육아 선배 여동생이 물었다.
- 산후 조리원은 예약했어? 요즘 몇 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대. -
- 아니 말은 들었는데 예약이 힘들어? -
- 당연 하지 -
여동생은 다소 짜증이 섞여 있는 한심함으로 나를 쳐다본다. 동생의 말은 계속되었지만 들리지 않는다.
1990년 대에 아리를 낳은 나의 친구들에게 산후 조리원은 들은 적이 없다.
그즈음 (그때부터 3년 전) 후배들에게 산후 조리원을 듣기는 했느냐 후배들이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돌에 아이 옷이나 금반지 사주는 것으로 축하를 해본 터라 산후 조리원에는 가본 적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옛말이고 몇 달만에 개벽 천지가 쉽게 이루어진다는 한국 생활 3년 공백은 크고도 깊었다.
출산준비물에서 트렌드를 느낀 것은 시작이었다.
그 후 15년간 나는 항상 내 또래보다 10년은 늦게 하는 모든 것 때문에 내 친구들에게서는 못 보던 것들을 항상 주변의 젊은 엄마들을 보며 헉헉 거리며 따라왔다. 산후조리원 문화도 대표적인 것이었다.
산후 조리원이 필요했다.
친정엄마도 시어머니도 나이가 있으셨고 늦은 나이에 나의 산후조리를 버거워하셨다.
그리하여 마당발로 소문난 동생의 뛰어난 활약으로 산후 조리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비싼 가격에 놀라서 일주일만 예약했다가. 나중에 내 몸이 안 좋아서 일주일 연장하면서 병원에 딸린 조리원이라 그대로 연장이 안된다 하여 병원으로 조리원으로 한 바퀴 돌았다. 길고 긴 사연이 있었고 어쨌든 조리원에 들어갔다.
나는 거기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가장 많은 사람은 마흔에 결혼하여 오랜 난임 끝에 아이를 얻은 마흔일곱의 언니였고 그다음이 나였다.
나는 그를 뺀 모든 산모들의 언니가 되었다.
다소 까칠한 성격으로 시대와 이십 대를 보낸 덕에 나를 언니라 불렀던 사람은 내 동생과 육촌 여동생 정도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이들이 언니라 부르자 상당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때의 당혹감은 아이를 키우는 내내 다른 형태의 당혹감으로 형태를 달리하여 따라다닌다.
다른 젊은 엄마들은 산전 요가며, 운동 이야기며, 또 산전에 자신들이 했거나 준비한 것들을 이야기하며
- 언니는? -이라는 표정으로 보았다.
난 한 게 없다고 하면 그네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매우 무책임하고 게으르며 너무 준비 없이 아이를 낳은 게 아니냐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나도 한국에 있었으면, 나도 십 년만 전에 아이를 낳았으면
그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온갖 트렌드를 익히고 앞장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아이가 빨간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방에서 지냈다.
어쩌다 나가 보면 그들은 유축기를 사용해서 초유를 저장하고, 수유 쿠션을 이용했으며, 아이에게 오일 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다. 나도 뒤늦게 유축기를 샀고(한 달도 사용 못했다. 젖이 부족해서 유축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조카의 수유 쿠션이 공수되어 왔고, 뒤늦게 조리원 원장님께 마사지 법을 배웠다.
살면서 남에게 많이 뒤 쳐 저 있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으로 했다.
나는 우리 학교에서 처음으로 워드로 시험 문제를 제출했고, 처음으로 개인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수업에 활용했다 라며 나름 자부심을 가졌던 나의 커리어는 빨간 얼굴로 젖 달라고 한 성질 하는 딸 앞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산지기네 거문고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육을 했다고 했다.
아! 생각해보니 나는 뱃속의 아이에게 교육한 것이 없었다. 입덧 없다고 좋아하며 배부르게 먹고, 평생 못 잔 잠 보충하듯 늘어지게 잘 자고, 아이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책들 (소설 , 문학 이론이나 철학사 심지어 추리소설을 ) 읽었고,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말에 심심해서 평생 안 하던 고스톱을 배워서 밤이면 남편과 점 당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면서 빽빽거리며 싸우기까지 했는데 에고......
그리하여 나는 아이에게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을 하였고 그네들은 나를 천연기념물 대하듯 했다.
마지막 즈음에 조리원으로 온 동생은 나 혼자 방에 누워 있는 것 보더니
-언니 조리원 친구가 초등학교 친구 되는 것 몰라?-
라며 나를 채근했지만 나는 모처럼 가볍고 편하게 반듯하게 누워 있는 것이 좋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따라 가봐야 어차피 따라 것에 불과하다는 나름의 철학을 깨닫고 있었다.
- 나는 어차피 여기 아니라 다른 데서 애 키울 건데 뭐. -
아무리 트렌드가 있어도 아이는 내 생각대로 키워야 할 것 같았다.
오랜 교직생활 결과 엄마가 자신의 굳건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움직여야지 주변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에게 혼란만 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십오 년 주변을 따를 거인가 내 의지대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