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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나무 Aug 05. 2022

처음으로 내가 좀 괜찮은 엄마라는 생각이 든 날

사춘기 딸아이는 샴푸 냄새를 폴폴 풍기며,  티셔츠 서 네 개를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나에게 의상 품평을 부탁한다. 아무리 그래 봤자 내 눈엔 그저 그런 똑같은 티셔츠로 보이지만 다정한 엄마, 소통하는 엄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노안이 와서 흐린 눈에 힘을 주며 바라본다.


어차피 내 의견을 따를 생각은 없다는 것을 나도 딸아이도 잘 알지만 맞장구를 쳐대는 나를 뒤로 하고 딸은 광속으로 뛰어 나간다. 방학 중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아이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딸아이가 떠나고 딸아이 침대에 엎어진 기타를 바로 세우고, 책상을 꽉 채운 망원경을 바로 해 주다가 갑자기 울컥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한량도 이런 한량이 없다.

기타 배우고, 그림 배우고, 배드민턴 치러 간다. 공부만 안 한다.


문을 닫고 조용하면 뭐하나 싶어서 배 나온 무거운 몸을 최대한 둥글게 가볍게 만들어 살짝 감추고 문틈으로 들여다본다. 사춘기 딸아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아니 사실 아이와 치르는 소모전이 싫어서  아이의 생활에 심한 간섭을 하지 않는 쿨한 엄마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여러 신을 찾으며 내 마음을 진정하려 하나 세상 닮은 것 없는 데도 쓸데없는 호기심은 서로 비슷해서 미치도록 궁금해진다. 이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는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을 과시하며 딸아이 문 앞에 매미처럼 찰싹 붙어 있고는 한다.


하루 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기타를 안고 뒹굴, 인형을 안고 뒹굴....... 어쩌다 책상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기쁘고 기특한 마음에 간식을 핑계 삼아 책상 앞에 다가서 보면 좋아하는 추리소설에 해외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한글로 된 소설책이나 만화책을 보고 있다.  할 말은 없다. 그 옛날 수업시간 하루 종일 책 밑에 온갖 소설 읽던 내 모습이 오버 렙 되어 한숨을 쉬며, 저 깊숙이에서 갑자기 뛰어나오는 열불을 참아내느라 가슴을 쓸어내리고, 가볍게 다가가느라 숨죽였던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듯 내 뱃살들이 자유를 느낄만한 무게감의 발소리를 내며 방을 나온다.


방학은 끝나가는데, 옆집 아이는 영어 수학을 하루에 몇 시간씩 하루도 빼지 않고 과외한다는데, 누구는 토플을 준비한다는데,  SAT 만점 받은 누구 엄마가 지난주에 엄마들에게 한턱 쏘았다는데 아.... 아.... 정말 목구멍 가득 아!라는 신음인지 한탄인지 밖에 안 나온다. 이번 방학도 공부는 물 건너갔다. 한탄 섞인 자조의 소리가 나온다. 저 좋으면 됐지. 지 인생인데 내가 어쩌겠어. 결국 인생은 정신승리라는 깨달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심연까지 파고드는 듯한 마성의 맛 인스턴트커피 두 개를 한꺼번에 넣은 아이스커피로 마음을 다스린다.  달달한 맛이 온몸을 전율케 하면서 뇌에까지 전달되었는지 방금 전의 열불 나는 사태에 대한 흥분이 다소 진정된다.


사실 아이의 저런 생활을 이끈 것은 나다.  

이 사실이 어쩔 때는 참 뼈 때리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나는 공부는 하고 싶고 해야 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왠지 내 아이는 공부를 잘하지 않을까 하는 근자감에 사로잡혔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학교의 상담에 와서 아이가 머리는 좋고 능력은 있는데 노력이 부족해서 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그 수많은 엄마들 중의 대표 엄마가 되었다.  그러면서 교사의 희망 어린 말 한마디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안 하는 것도 못하는 거다라는 나름의 명석한 판단을 세상에 둘도 없이 싹수없게 말하던 나는 영원히 누워 있을 거 같던 아이가 처음 뒤집던 날,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수많은 단어를 사용하여 말을 줄줄하게 되었을 때 영특하다 못해 천재성을 지닌 것 같은 아이의 똑똑함에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모른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었고 지금도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머리는, 머리는 생각하는데 타고난 팔랑귀는 나를 가끔 고통스럽게 한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나름의 능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을 갖추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고 공부를 잘하려면 어린 시절 공부를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00 엄마의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성벽 같은 단단한 삼단 논리에 아 이것이 진리라는 깨달음은 내 필생의 신념에 균열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좀 시켜 보겠노라고 그래서 능력을 키워주겠노라고 그래서 행복한 아이의 인생을 설계하겠노라고 아이를 책상에 앉히려 했으나 00 엄마의 성벽 같은 논리를 머리로만 체험한 나의 논리는 태풍부는 바닷가에 대간 쌓은 모래성보다 허약하였기에 아이의 저항보다도 내가 먼저 흔들거렸다. 필생의 금 간 신념과 허약한 신생 논리 사이에서 나는 괴롭고 또 괴롭다.


남들은 내가 늦둥이 엄마라 아이에게 휘둘려서 아이 공부를 확실히 못하고 아이를 그냥 오냐오냐 저 하고 싶은 대로만 둔다고 나를 압박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그런 거 아닌가 싶어 반성하다가도 또래 엄마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산 내가 보기에 공부나 능력과 행복이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고 또 보고 왔기에 생긴 나의 신념에 기대어 보다가도 바람에 이는 바람에도 팔랑이는 내 마음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팔랑귀에 고통받으면서도 기타 치고. 그림 그리고 친구 만나러 세상 행복한 딸아이의 내음이 가득한 방 안에서 내가 좀 괜찮은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내 고통을 참은 덕(?)에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내가 좀 괜찮은 엄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금이 갔더라도 나름이 신념을 지킨 것에 대한 만족인지 좀 전에 털어 넣은 마약처럼 온몸에 스며든 달달한 커피의 효과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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