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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나무 Oct 12. 2022

커피믹스 없는 인생은 너무 쓰다.

난 커피믹스를 사랑한다.

달달하고 고상하지 않은 솔직한 맛, 혀 끝에 착착 감아 도는 달짝지근한 마성의 맛, 어릴 때 엄마 몰래 대접에 타서 마시던 달달한 설탕물에 쌉쌀한 커피맛을 입힌 것 같은 가슴 뛰게 하는 맛, 두뇌에 도파민을 바로 이끌어  듯한 착각까지도 불러들이는 내 영혼의 단맛.


어떤 날은 언제 커피믹스를 언제 마실 것인가를 하루 종일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시간을 정하고 나면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리는 짜릿함을 맛보다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리에 앉아 의식을 치르듯 믹스커피를 마신다. 보다 풍부한 느낌을 위하여 커피믹스 두 개를 한꺼번에 머그잔 가득 채우기도 한다 (마시는 것은  한 잔이지만). 그런데 언제나 인생이 그렇듯 막상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짧고 또 생각에 빠져 커피맛에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많아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마지막  커피 방울이 입술을  지나쳐 가고 나면 괜히 혼자 분해하고는 한다.


나의 이런 태도를 두고 값비싼 이름도 어려운 무슨 수제 원두커피도 아닌 인스턴트 커피믹스에 뭘 그러느냐는 반응들이다. 그런데 그럴만하다.  

살아낼수록 참 씁쓸해지는 인생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단맛을 주는 존재가 세상에 많지는 않다.


삶이 책 한 권으로 부족하다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인생의 고비를 넘기는 순간들이  지침없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쉬지 않고 차근차근 다가왔고, 다가오고 있고, 다가올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과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한 재능도 탑재하지 못한 나에게 항상 세상은 녹록지 않았고, 온 힘을 다하여 기죽지 않고 오십 년 이상을 잘 버텨 온 나에게 내가 주는 최고의 선물은 끝없이 밀려와 목구멍  위로 치밀어 오르는 그 인생의 씁쓸함을 저 깊숙이 밀어버리는 달달한 커피믹스 한잔이다.


몇 년 전 내가 초기 유방암을 앓게 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아니 사실은 내 내면에서도 커피믹스를 원흉의 하나로 보고 멀리멀리 내쳐야 할 천만년의 적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아니 커피믹스는 변호인을 선임하고플 정도의 억울함이 있었다. 사실 난 카 페민에 민감해서 커피를 많이 마시지 못한다. 젊은 시절엔 커피가 소화에 좋지 못해서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믹스가 내 병에 악의 축 취급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커피믹스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 십여 년 전 베트남에서부터이다.

늦깎이 결혼도 항상 순조롭지 만은 않았고, 마흔에 얻은 네 살 딸아이를 더운 나라에서 혼자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낳으면서부터 직장을 다느니라 친정엄마가 거의 키웠던 네 살짜리 아이는 베트남 도착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는데도 토하고 나서 곡기를 끊고 보채기만 했다. 거의 스물네 시간 내 곁에 붙어 안 먹으려는 아이를 몇 시간에 걸쳐 몇 숟갈  먹이고, 안 자려는 아이 재우고, 하루 두어 시간 어린이 집에 보내려 데려다주고 데려 오는데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을 쓰며 난 정말 온몸에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몸이 힘든 것 보다도 나이만 많고 아이 키우는 일에 익숙지 않은 엄마라는 사실이 더욱 힘들게 했다.


어느 날 아이 어린이 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잠시의 틈이 생겨 소파에 앉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국에서 온 지인이 주고 간 커피믹스를 한잔 마셨다.  잠시의 휴식이 주는 편안함이었는지 커피믹스의 맛 때문이었는지 난 정말 순간적으로 행복해졌다. 그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냥 내 몸에 가득차들던 행복감이 나를 각성시켰다.


그리고... 그리고 난 커피믹스에 중독되었다.

그날 느꼈던 그 행복감을 기대하며 날마다 한 잔씩 마셨다. 두 잔은 못 마셨다. 불면증이 도져서...


그리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난 루틴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루틴이 깨어지면 내 삶이 흔들릴까 봐서....


그런데 내가 커피믹스에 취하는 그 행복감은 왠지 나의 의지를 실험하는  악마의 선물 같았다.

그래서 100개들이 커피믹스의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나는 커피믹스를 새로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나는 아파트 윗집의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지인의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삼십 분 후 나는 친하지 않은 지인에게 변명을 하면서 (더운 나라인 데다가 한국 마트가 삼십 분 이상 걸리는데 그날 은 기사가 없었고 아이 픽업 때문에 다른 곳에 갈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친하지 않은 지인에게 인스턴트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고 몇 개의 인스턴트 스틱을 두 손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난 그날 이후 비 오고 바람 부는데 건물 밑 처마에서 벌벌 떨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이해했다.  매일 같이 술을 마셔서 아내의 구박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술 취한 개 취급을 받으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던 옆 집 아저씨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커피믹스 몇 개를 받고 나도 모르게 좋아하던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는 진실한 깨달음이었다.


커피믹스는 내 삶의 루틴을 가뿐하게 깨 버렸고, 내 건강을 위협하지만 내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조금 비굴해졌다. 나는 나 자신과 커피믹스와 타협을 했다. 커피믹스에서 설탕과 프림을 조금 덜어내 보았다.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서 너번 정도 커피잔에 줄을 그어서 삼 분의 일만 마시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두 세 모금 마시면 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상담을 가서 의사에게 진지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이지 커피믹스가 그립다고. 의사는 웃으며 가급적 끊어보라고 하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나쁠 수 있다고 했다. 솔직하게 마시고 싶으면 가끔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또 커피믹스를 마시지 않는 날도 그다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한 일주일 잊어버리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다. 삶이 씁쓸해서 좀 우울해지거나, 사춘기 딸이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비수처럼 따끔한 말을 예쁘게 해서 심장이 벌렁거릴 때,  이름도 희미해진  옛사람들이 떠오르거나,  내 나이를 인식할 때 불현듯 나는 달달한 커피믹스 한잔이 떠오른다.


솔직히 커피를 마시는 순간보다 커피믹스를 떠올리는 그 순간이 더 행복한다. 어쩌면 커피믹스의 단맛을 상상하며 그 단맛이 세상의 파고를 넘으며 쓰기만 만 인생을 달콤하게 해 주리라는 믿음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 그 금기. 커피 믹스를 금기시하면서도 금기에 대한 반발과 금기를 깨뜨리는 듯한 찌릿함이 나를 커피믹스에 더 집착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인생에 커피믹스처럼 달콤한 비장의 무기 하나 담고 있으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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