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하노이를 거쳐 두바이에서 자연 선텐으로 알록달록 검어진 피부를 깨닫지도 못하고 인천공항에 내린 마흔여덟의 엄마는 자신만만했다. 한국에 드디어 돌아왔으니 외국에서 자나 깨나 친구 타령으로 엄마 속을 타게 했던 딸아이에게 한국인 친구들이 넘치기 꼬여들 줄 알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인생을 책으로 배운 엄마의 착각이 깨어지는데 단 며칠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네 살에 내 등에 업혀 아빠 따라 베트남으로 떠난 아이는 베트남에서는 다니는 한국유치원이 너무 멀어서 친구들과 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어쩌다 집에 놀러 온 네 살 동갑내기 남자아이가 우리 집에 들어온지 30분 만에 엄마 보고 싶다고 울기 시작했고, 한 시간 거리의 집을 향해 떠나갔던 엄마가 택시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돌아오기까지 거의 한 시간 이상을 울어서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호텔 아파트 로비에서 기다리는데, 아이는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딸아이는 친구 간다고 울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쳐다 보고, 나는 네 살짜리 딸은 업고, 네 살짜리 남자아이는 안는 괴력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을 피해서 로비 밖 한 구석에서 40도의 온도를 잊고 서 있었다.
생각하면 마흔넷은 젊었다. 힘도 좋았다. 아 옛날이여....
두바이에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딸은 유치원은 재미있어했는데(한국유치원이 없어서 국제 유치원에 보냈다) 따로 친구를 사귀기에는 쉽지 않았다.
여섯 살 아이는 매일 친구 타령을 했다. 어느 날 여름 캠프에 다녀온 아이는 그날 캠프에 온 아이가 우리 아파트 옆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다. 의심 많은 나이 든 엄마는 응, 그래 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아이는 친구가 놀러 오랬다며 칭얼댔다. 결국 사흘 째 인내심도 한계에 달하고 갑자기 모험심이 솟아났다. 그래 가자. 나는 한국에서 가져간 신라면 다석 개를 쇼핑백에 담고 딸아이 손을 50도의 두바이 햇살을 꿋꿋하게 버티며 옆 아파트에 갔다. 아이가 말하는 아파트 호수 문 앞에서 참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벌렁벌렁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고르는데 아이가 참 잽싸게도 초인종을 눌렀다. 아이가 초인종을 누르는 벨 소리가 벌렁거리는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순간 잠시 두바이 열기에 녹았던 이성이 스멀거렸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여섯 살짜리 아이 말만 믿고...... 나도 모르게 아이 손을 잡고 돌아섰다.
그때 아파트 문이 열리며
"누구세요"
한국말이다. 한국말이 그렇게도 따스하고 다정하며 인간적인 언어인 줄 처음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느끼기에 가장 친절하고 환한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요. 저는 채*이 엄마예요. 얘가 며칠 전부터 자꾸 이 집에 친구가 산다고 해서요. 캠프에서 봤는데 얘가 친구가 놀러 오라고 했대... 서요. 죄송해.... 요. 너무 갑작... 스럽게... 실례인 줄은 아는데....."
뭐라고 많은 말은 했는데 말은 산으로 가고, 아 이게 무슨..... 주접인가
그런데 아이 친구 엄마는 반가워했다. 한국에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가 심심해해서 캠프에 보냈다고 했다. 아이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친구와 잘 놀았고 나는 겸손한 자세로 그 집 소파에 앉아서 배부르게 차를 마시고 사막에 해지는 모습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아이는 나의 몇 명의 한국 친구와 외국 아이를 친구로 사귀었지만 외국이고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친구를 많이 사귀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는 친구를 갈망하는 초등생이 되었고 나는 언제나 말했다. 한국에 가면 한국에만 가면 너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언어와 먼 거리 등이 친구 사귀기에 문제였다면 2014년 한국에서는 다른 문제가 친구 사귀기에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늦둥이 엄마의 아이 친구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