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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Sep 07. 2024

세 번째 괴물

몇 년 만에 만난 엄마와의 재회의 기쁨도 잠시, 중국에서 함께 생활한 지 반년도 채 안 돼서 엄마가 북한으로 북송되었다. 나를 만나고 동생도 빨리 보고 싶다는 엄마의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이었다. 엄마의 북송으로 낯선 타국에서 나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북송된 엄마의 생사가 걱정돼 나는 어설픈 중국어를 써가며 엄마를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새아빠를 설득했다. 다행히 새아빠는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전화 한 통을 받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브로커들에게 돈을 보내줬다. 하지만,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는 오지 않았고 두 차례에 걸쳐 보내준 돈은 모두 사기를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엄마를 구하겠다고 아빠를 설득해 돈을 보낸 것이 모두 사기당한 후 새아빠와 나의 사이는 급격히 안 좋아졌고 새아빠와의 다툼은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그러다 싸움이 격해지는 날이면 새아빠는 나를 공안에 신고하겠다며 전화기를 들고 협박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겁먹을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해볼 테면 해보라며 맞서 싸웠다. 그런 내 모습에 더 화가 난 새아빠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나의 따귀를 때렸다. 그 순간 무언가 내 볼을 스쳐 간 것을 느꼈고 곧 얼굴이 화끈거렸다. 치열하게 싸우던 그날의 싸움은 새아빠가 나의 따귀를 때린 후에야 끝이 났다. 새아빠는 본인도 나의 따귀를 때리고 놀랐는지 이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나는 그날 이후 이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도 없고, 핏줄 다른 여동생과 말도 안 통하는 새아빠와 함께 사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새아빠 집에서 탈출하기 며칠 전 어느 날 밤이었다. 누군가 나의 몸에 손을 대는 것 같은 느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뜬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소리도 제대로 못 지르고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어두운 밤이라 나를 짓누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 봐도 새아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그 순간 새아빠는 큰 손으로 내 입을 막아버렸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나보다 두 배는 더 육중한 그 사람의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사람의 물리적 힘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짓누르고 본인의 만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 모습은 앞서 나를 성폭행한 두 괴물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내 몸을 옥죄는 지옥 같은 시간을 얼마나 참았을까. 그 괴물은 힘을 다 쓴 듯 이내 쓰러지듯 내 옆으로 내려와 누웠다. 나는 그 괴물이 내 위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추위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 괴물의 더러운 정자들을 한 톨도 남김없이 내 몸속에서 빠져나가길 바라며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변이 나오는 대로 얼어붙는 날씨임에도 나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아서 집에 들어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사실 샤워라고 하기보다는 뜨거운 물에 나를 담가 놓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나를 대하는 그 괴물의 얼굴을 보니 역겹다 못해 구토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핏줄이 다른 여동생은 친할머니 집에서 아침 일찍 돌아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동생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 괴물의 모습을 보니 내 신세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과연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 걸까? 내가 왜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 사람들과 함께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거지? 어차피 엄마도 없는데 엄마가 없으면 어차피 이 사람들은 나랑 전혀 상관없는 남이잖아. 잠깐이지만,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그 괴물은 출근한 상태였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은 꿈에도 모르는 여동생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동생이 순간 밉기까지 했다. 왜 하필 어제저녁에 할머니 집에 가서 내가 이런 일을 당하게 만드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사실 동생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짐승 같은 행동을 한 그 괴물이 잘못한 것이지.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절대로 동생 없이 집에 혼자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 집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그 괴물은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오면 동생이 있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방은 두 개였지만, 동생과 내가 항상 함께 자면 절대 나를 건드릴 수 없었다. 동생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한 성격 하는 아이였기에 차마 자기 딸 앞에서는 그럴 용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그 집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동생을 내 옆에 있게 했다.

드디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 집에서 탈출하는 날이었다. 나는 해방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울적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이 집에서 엄마 없이 보낸 시간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떠나려는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울적하고 편하지가 않았다. 서로 말은 안 통했지만, 몇 개월 함께 생활했고 무엇보다 그 괴물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동생을 방패 삼아 견딘 시간들이 미안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핏줄은 다르지만 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동생을 두고 나오는 미안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당시 어떤 감정 때문에 울적하고 서러운 감정이 들었는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지옥 같은 그 집에서 탈출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국에 온 지 몇 년 후 그 괴물이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준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하자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새아빠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탈을 쓰고 나를 성폭행했던 사촌오빠, 새 이모부 모두 언젠가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가해자가 죽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후련하지도 않고 죗값을 받았다는 느낌은 더더욱 안 들었다. 과연 가해자들에겐 어떤 벌을 줘야 하는 걸까. 신이 있다면 그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가해자들을 벌을 주는 것 같진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의 10대 시절엔 낮과 밤 모두 공포의 시간이었다. 도망쳐야만 살 수 있는 도망자의 인생. 만약에 내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이토록 더럽고 추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여자로 태어난 것뿐. 정말 다행인 건 나의 맑은 영혼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괴물들이 나에게서 뺏어간 것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나의 육체뿐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어린 나이었지만, 삶의 의지가 정말 강한 소녀였다.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이겨냈을까.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삶의 벼랑 끝에서 나는 오로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의지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삶은 나의 편에 서줬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나는 가장 고독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세상 누구도 나의 삶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잘 이겨낸다면 세상 어떤 일도 다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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