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소설 성철 1,2

by Norah

소설 성철 1,2 - 백금남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형성된 편견을 가지고 내가 아는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다른 환경에서 받아들이는 정보가 다르다보니 맞니 틀리니 시비삼고 분쟁은 끝도 없다. 진리는 하나의 문으로 통한다고 하지만 그 진리 추구의 방식조차 자신이 옳다고 싸워댄다.


불법을 많이 안다고 부처와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고 표현할 수 없다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자유이고 자유는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아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항하사만큼 다른 의견을 모두 아우르다보면 걸림이 없는 경지, 곧 중도가 된다.




<좋은 문구 발췌>


법신의 실상을 깨닫고 나니 아무 것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을 갖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날까 두렵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본래본법성. 깨치고 보니 잘라낼 것이 하나도 없더라는 거야


네 놈이 속가에 있을 때 왜 그렇게 빨리 혼침의 경지에 든 줄 아느냐? 그 어떤 선입관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보가 전무했기 때문이란 말이다.


일생 동안 들여다봐도 다 못 읽을 경전을 한평생 읽고만 있을 것이냐


그래서 교승과 선승은 서로 다른 것이다. 교는 알음알이이므로 그 알음알이을 통해 깨침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깨달음이지 깨침이 아니다. 그들은 말하지. 깨달음이 있어야 깨침이 된다고. 그러나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는 법. 도란 닦음이 아니라 몰록 깨치는 것이다. 일체를 비우는 작업. 바로 네놈이 그토록 알고자 했던 알음알이를 모두 토해냈을 때 비로소 너의 심신이 거울같이 되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순진무구한 본래의 너로 돌아갈 수 있다.


선이 무엇이냐. 가만히 앉아 우주를 관하다 보면 문득 깨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머릿속을 비우지 않고는 천만년 좌선을 해도 주어진 화두를 풀 수 없다. 논리나 사리, 추측 따위로 절대 풀지 못한다. 세속의 지식은 오히려 깨침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비우고도 견성하기가 어려운데 문제만 생기면 먼저 논리적으로 풀려고 하니 깨칠 수가 없다. 이것이 배운 자의 병폐다. 이것이 세속에서는 성공의 발판이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악폐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의 육조혜능 선사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불맥을 이을 정도로 도심이 깊었다. 학승은 평생을 부처님 말씀에 매달려도 혜능 선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이다.


진리는 문자를 세우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을 내뱉으면 그것은 이미 사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죽은 말.


오직 이 우주는 우리의 한 생각이라는 것. 우리 한 생각이 우주 만유의 핵심이라는 것.


교는 우리가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얻을 수 있지만 선, 즉 부처님 마음자리인 선은 생각이 끊어져야만 거기에 합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도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생활 그 자체다. 백정질을 한다면 그 길이 도다


버림은 구하기 위한 방편이다. 반야를 만나면 반야를 죽여야 하고 부처을 만나면 부처를 죽이지 않고서는 그 경지를 절대로 얻을 수 없다


강을 건넜으니 이제 배는 필요 없다


선의 본질이 무엇이야? 거스르지 않고 강물처럼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모르는 것, 즉 무지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앎을 놓아버리는 것이 올바른 수행법이다. 한마디로 무지는 악이다. 그러니 악을 모르고 어떻게 선을 알겠는가


고행은 하되 그 고행을 의식하지 않는 고행을 하라는 기다. 그럼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 된다


남을 돕는 것은 착한 일이지만 남몰래 해야 합니다. 이를 자랑한다면 불공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일입니다


모든 중생은 본디 자성이 청정하기에 자신의 자성을 보면 부처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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