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판사인 아버지와 의사인 어머니의 보호 아래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나 서울대를 나왔고 매주 와인 모임을 가며 친목을 다지고 있고......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자격과 조건을 이야기한다. 명품 포장지로 휘감긴 싸구려 팔찌를 소개하라고 하면 팔찌의 가치나 쓰임새, 장단점을 말하지 포장지에 대한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소개하라고 하면 전부 껍데기만 꺼내들고 떠들게 된다.
물론 환경이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본질인 줄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보니 진짜 자신이 누군지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정작 자신을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는 듯하다. 선인들은 내 몸과 내 생각도 내가 아니라고 한 걸 보면 이런 자기소개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대학시절 우리 과에 얌체같은 언니가 있었는데 국내 일등 회사에 입사하고부터 모임에서도 기세등등하다 못해 거만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언니의 친한 친구 말로는 그 언니가 과도한 업무로 정신과 약까지 타먹고 있으며 연봉과 회사 간판때문에 그 곳을 떠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언니는 어디서든 자기를 대기업 다니는 골드 미스라고 소개했지만 실상은 불행한 일벌레일 뿐이었다.
나 역시 유치하게도 좋은 회사와 높은 지위에 으스댄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런 신분, 타이틀, 조건을 다 떼고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 회사는 내가 일군 회사도 아니고 매니저는 내 이름도 아니었다. 무슨 옷을 입었느냐보다 어떤 몸과 표정과 건강 상태를 가졌느냐가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가 더 절실했다. 나는 항상 장자같은 삶을 살고 싶었고 집착이라는 것도 버리고 싶었으며 그러다보니 이득되는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퇴사도 미련없이 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의 라이프 스타일은 다르다. 화려한 것을 추구하면 화려하게, 소박한 것을 원하면 소박하게, 무얼 입든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중요하다. 그 언니처럼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도 애써 아닌 척 자기 기만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나는 지금 나의 생활에 걸림없이 행복하고 즐거운가. 나는 타인에게 어떻게 나를 소개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는 사람은 필히 발전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