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심
스무살 때 내 머리에 꽂혀버린 단어, 부동심. 검도를 하다보면 칼끝을 살짝 움직이는 상대의 교란술에 휘말릴 때가 있다. 넋놓고 있거나 기민함이 없다면 오지게 뚜드리 맞게 된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상황을 기다리면서 치고 빠지고를 잘 하는 것이 비법이다. 나는 검도를 하면서 단순한 기술만 익힐게 아니라 마음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골프도 마찬가지이다. 미세한 감정에도 샷이 흐트러지니 심신을 같이 훈련함이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락가락하고 나 역시 사춘기부터 수시로 요동치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 어떤 환경에도 움직이지 마음을 계속 갈구하다가, 이십대 초반에 앞으로는 무조건 이성적으로만 판단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목계지덕 이야기를 만나면서 마음을 제대로 굳힐 수 있었다. 그 때부터 내가 있는 곳에는 항상 목계지덕을 써놓았고, 회사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놓은 목계지덕 포스트잇도 퇴사하는 날 떼고 나왔을 정도로 그 단어는 오랫동안 내 좌우명이었다.
요즘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목계지덕은 나무로 만든 닭의 덕이란 뜻이다. 닭싸움을 좋아하는 왕이 자신의 닭이 최강의 투계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조련사에게 닭을 맡기는 것에서 얘기가 시작된다. 왕은 훈련이 다 됐을거라 생각하고 조련사를 찾아갔지만 아직 교만해서 열흘 뒤에 오라고 했고, 열흘 뒤에는 아직 조급함이 있어 다시 열흘 뒤에 찾아오라고 한다. 그 후 열흘이 지나서는 공격적인 눈초리때문에 아직 멀었다고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고,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의 닭은 나무로 만든 것 같이 미동도 없어서 보기만 해도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스토리이다.
영화 루시를 봐도 목계지덕과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가 있다. 뇌의 가용 범위가 넓어질수록 루시의 눈물은 말라가고 냉철하며 논리적으로 변해간다. 스님들도 감정에 치우쳤다면 가족과의 연도 끊고 산에 들어갈 수가 없고, 마음 공부에서 얻는 깨침 역시 감정을 멀리 치우고 봤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감정보다 이성이 더 우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감정에 치중하면 괴로움이 동반되기에 고통이 적은 삶을 살고 싶다면 목계가 되는 것도 방법이 된다는 뜻이다. 감정적으로 사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살아도 된다.
몇 년 전, 친구와 이러한 얘기들을 주고 받다가 질문이 들어왔다. 그렇게 살면(이성적으로 살면) 인간이 로봇과 다를게 뭐가 있냐고. 나는 답했다. 들쭉날쭉 복잡한 감정의 자리에 아름답고 잔잔한 낭만을 채워넣으면 된다고. 음악을 듣고, 미술품을 감상하고, 책을 읽고, 산책과 운동을 하고, 여행하며 새로운 눈을 키우는 행동을 통해 삶을 더 다채롭게 살면 된다고. 그런 낭만은 감정적으로 속 시끄러울 때가 아닌 고요할 때만 찾아온다고 말이다. 고요함은 부동심에서 오고, 나를 알아차리는 것, 깨달음, 진리, 극한 경이로움은 고요함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고요함을 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목계가 되어도 행복할 수 있다. 아니, 행복해지기 더 쉬울 것이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한국인보다 무뚝뚝하지만 이성적인 북유럽 국민들의 행복도는 높고 자살률은 더 낮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 행복이 없는 삶이 죽음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자신이 행복하다면 누구도 그 길에 대해서는 함부로 입을 대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