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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ah Feb 23. 2024

더이상 만날 수 없는 나의 주치의

존경하는 의사 선생님

지독스럽게 골골댔던 어린 시절, 내 집 드나들듯 가던 동네 병원이 있었다. 갈 때마다 웨이팅이 적어도 한 시간일 정도로 늘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여환자는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찰 때마다 웃통을 목까지 까고 초밀접 거리에서 청진기를 대시는 의사 선생님이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 언니들도 질색을 하며 거긴 못 가겠다고 했는데 나는 가슴이 없던 시절부터 다녔던터라 그런 것에 개의치않았다.

그 의사 선생님은 어떤 손님이든 늘 밝게 맞아주셨고 한 인물 하시고 농담도 잘 하시는 유쾌하신 분이셨다. 환자들이 그렇게 밀려있어도 워낙 정밀하게 잘 봐주시고 설명도 상세히 해주시며 빨리 낫기까지 하니 다른 동네에서 오는 사람도 꽤 있었다. 한 번은, 엄마 친구가 진료를 받을 때 그 분께서 그 아줌마의 유방의 모양을 보시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셨고 그 아줌마는 대학병원에서 유방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잘 마치셨다. 나는 그말을 듣고서야 거기서는 왜 웃통을 이빠이 까야하는지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 대구에 놀러갔다가 술을 오지게 퍼붓고 나서 계속 토를 했는데 나중엔 피까지 울컥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식겁을 했다. 날생선 먹은듯한 비릿한 역겨움을 겨우 참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의사 선생님을 찾았다. 그 분은 식도가 찢어져서 그렇고 이건 시간 지나면 낫는다고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나는 안도를 하며 엄마한텐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드리고 나와서 진료비를 내려고 하는데 간호사가 그냥 가시라고, 원장님이 그렇게 시키셨다고 했다. 그 분은 나 뿐만 아니라 식구들 건강에도 많은 정보와 도움을 주셨고, 뭐든지 받으면 두세배로 주시는 우리 엄마는 그 분께 자주 뭘 챙겨드리곤 하셨다.

십여년 전쯤 되었을까. 그 의사 선생님께서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그 분 연세가 60대 초 밖에 안되었는데 암에 걸리시고도 그런 말도 없이 환자를 보셨던 것이었다. 평생 환자의 건강만 생각하시느라 정작 본인은 잘 챙기지 못하셨음을 알기에 마음이 너무 아렸다. 아프면 그 분 찾아가면 되지 하는 든든한 마음도 더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살면서 소소하게 고마운 분들은 참 많았지만 그 분은 내 인생의 귀인 그 자체셨다.

요즘 의사 파업 사태를 보면서 그 의사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의사들의 입장도 분명 일리가 있고 여론몰이에 억울한 면도 많겠지만 직업에는 본분이라는 것이 있다. 어린 자식이 말을 안들으면 교육을 시켜야지 밥을 굶겨서는 안된다. 그건 엄마의 본분이다. 아내와 싸웠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폭력을 행사하거나 회사를 안나가서는 안된다. 그건 가장의 본분이다. 내 주장을 제대로 피력하려면 기본적인 것은 지키면서 조율을 해야 한다.

판사가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혹은 전관예우를 빌미로 말도 안되는 판결을 내리고, 경찰이 뒷돈받고 조폭을 실드쳐주고, 선생이 시험지를 유출해 거래하는 세상. 대체 어떤 집구석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으며, 그 좋은 머리를 왜 그렇게 밖에 못쓸까 하는 안타까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 시대.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빠를 것 같다. 나는 그저 내 본분에나 충실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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