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도끼에 발등찍힌다
해외에서 알게 된 지인이 있다. 그는 요새 잠도 못자고 입이 바싹 말라있다. 매일을 연락하고 형처럼 따르던 선배가 해외출장 가서 일주일 넘게 연락이 안돼 실종 신고를 했단다. 그 선배에게 거액의 투자금도 맡겼고 자기때문에 투자한 사람도 여럿 있었으니 아연실색할만도 했다. 나는 그 선배라는 사람을 보진 못했고 평소 지인을 통해 백억쯤 있는 재력가란 소리와 미담만 들었는데,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다. 재산이란 것이 본인이 까발리지 않으면 쉽게 알 수도 없을 뿐더러, 그걸 오픈하는 사람은 일단 의심부터 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실종이 아니라 먹튀같다고 하니, 공장이고 집이고 다 놔두고 그럴리가 없다고, 몇년을 봐 온 사인데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사방팔방으로 수색한 후 밝혀진 바로는 싹다 껍데기였으며 돈들고 튄 게 맞았다. 그 분은 사기꾼에게 몇년을 농락당한 것이었다.
회사 다닐 때 한 동료는 이모의 설득으로 투자해서 높은 이자를 계속 받다가 나중엔 그녀의 배신으로 집까지 날려 신불자가 된 적도 있었다. 최근엔 오래 알고 지낸 사치녀가 주변인들에게 투자받고 잠적했다는 뉴스도 보도된 적이 있다. 그 외에도 십년 넘게 모임하던 아줌마가 곗돈 들고 야반도주한 얘기, 절친따라 갔다가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갇혀버린 얘기 등 사기꾼 스토리는 진짜 자주 들린다. 몇년전에는 친구 일을 도와주다가 나에게 공인인증서와 비번을 맡기는 걸보고 버럭한 적이 있었다. 의심많은 놈이 나를 철석같이 믿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사기는 한순간에 당할 수 있다는 걸 상기시켜주고 싶은 마음에 비번을 당장 바꾸라고 하고 그런건 니만 알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사기는 주로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게 되고 오래 봐 와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쉽게 안 바뀌는 것도 사람이지만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사람이다. 한 길 사람 속은 아무도 모르고 발등은 믿는 도끼에 찍힌다. 요즘엔 아는 사람 뿐만 아니라 보이스피싱, 스미싱, AI로 얼굴이나 목소리까지 변조해 속이려드니 눈뜨고 코베이는 사람이 넘쳐난다.
최근엔 성공팔이들에 대한 논란도 자주 보이는데, 성공하기 전에 성공했다고 속여서 강의, 책, 컨텐츠를 팔아 진짜로 큰 부를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의 성공 컨셉처럼 되어버렸다. 부풀어진 경력을 이용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을 악용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으나 올바른 판단없이 끄달려 가는 사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개중에는 진짜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기 의심이 가득해 타인의 말만 믿고 의존하게 되니 큰 소득도 없이 그들의 배만 불려주고 끝나버린다.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하고 볼 수는 없지만 세상이 험한만큼 신중하게 살 필요가 있다.
몇십년 전에 배우 신신애님께서 짜가가 판을 친다고 노래하셨는데, 지금의 짜가는 그 당시 짜가의 곱절 이상이 되어보인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능력이 없으면 악인들에게 온천지 휩쓸려다니다가 만신창이가 되며, 욕심과 감정이 앞서면 시야가 흐려지고 사기꾼의 밥이 되기 쉽다. 내 줏대가 없으면 가짜에 흔들린다. 자기만의 기준과 뚝심이 있고 논리적인 사람은 가짜에 속았다고 울분을 터뜨리지 않는다. 가짜들이 넘쳐나도 내가 진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내 진심을 모르면 나 역시 가짜가 된다. 짜가가 판치는 세상에는 정신 단디 박고 자기만의 색깔을 유지해나가는 강단이 필요하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