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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May 22.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28번째 방법


27번째 1편에 이어 2편을 이어가겠습니다.




#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


니체는 인간 변화의 첫 단계를 빌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막의 낙타를 바라보라고 말이죠. 낙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낙타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노동, 메마름,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모습? 이런거 아닌가요?



낙타를 바라보면, 우리는 인간의 변신단계의 처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낙타는 말이죠.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묵묵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합니다. 아니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니깐요. 저는 이 동물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바로 저의 어머니입니다.




모두의 어머니가 그렇겠지만, 저의 어머니 역시 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녀는 홀로 자식 세명을 키워야 했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 늦게까지 일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직업을 3개씩 가진적도 많았습니다. 휴일이 없는 고독한 평생을 살았지만, 단 한번도 우리 앞에서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매일을 고통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며, 저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얼굴에 반신마비가 올 정도로 아파하셨던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을 하고도, 항상 먹고 살 걱정만 하시며, 어둠속에서 견뎌오셨습니다.

그런 낙타의 보살핌 밑에서 자랐기에, 자유로운 제가 있을 수 있었겠죠. 그래서 저는 이 동물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해서 마냥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의 가족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쉽게 낙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상징어는 'I should' 입니다.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지 못하는 낙타 속에서 우리는 성실하지만 기쁠 수 없는 한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낙타는 사막을 걸어가야 합니다. 걷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들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에 집중하며, 묵묵히 불편없이 주어진대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니체 변화의 1단계인 낙타의 모습입니다. 사실 말이 1단계이지, 오해 없으셨으면 해요. 니체는 낙타의 단계에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정말 소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낙타처럼 꾸준히 살아가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것이 사실이잖아요.








# 포효하는 사자.




니체의 단계에는 사자의 단계도 있습니다. 사자는 누구에게도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포효합니다. 사자의 포효는 세상을 바꿔버린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주장합니다. 내 삶이 어떤 삶이 되었다고 해도, 그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일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상징어는 'I will' 입니다. 무엇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동물이자 상징입니다. 




낙타는 '예'를 외칩니다. 언제나 누구의 명령에도 '예'를 외치는 낙타와 달리 사자는 '아니오'를 외칩니다. 그렇다고 낙타와 사자가 반대가 되는 개념이라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사자는 자신이 원하는 일에 반대하는 것에만 '아니오'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래서 사자는 I want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자는 자신이 하는 말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립니다. 자신이 말한 목표에 스스로가 가둬져서, 사자는 많이 아프고, 매우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사자의 단계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부정과 긍정의 이야기를 잠깐만 드리겠습니다. 사자는 분명 긍정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긍정은 진짜 긍정이 아닙니다. 진짜 긍정은 부정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긍정에는 말이죠. 내부에 있는 부정이나 긍정 모두를 긍정으로 바꾸는 성격이 있습니다. 내부의 긍정이 긍정이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 데, 내부의 부정이 긍정이 된다는 것은 무슨의미 일까요? 




예를 들어보죠. 어떤 고등학생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부모에게 선포를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냥 놀고 싶어서 대학을 안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부정적 행위겠지요? 그런데 만약 이 친구가 사업을 하려고, 시간을 아끼기위해 대학을 안가는 것이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기위해 부정을 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긍정의 행위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긍정이 부정을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부정보다는 긍정이 더 큰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상이 내부가 아니라 외부의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겠다고 배척하는 것은 그것이 긍정이 된다고 해도 결국 밖에 있는것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립니다. 






사자는 안타깝게도 부정을 포함하는 긍정이 아니라 긍정 밖의 부정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 사자의 삶은 부정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여러분은 그런적 있으신가요? 누군가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너무 쎈 주장을 하는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적은 없나요? 종교를 이야기하거나 정치를 이야기 할때 특정인을 너무 선호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그 사람이 더 멀게 느껴지고 반감이 생겨버리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으신가요? 사자가 꼭 그런 동물 같습니다. 나에게 강한 긍정이 타인에게 부정이 되고, 선을 그어버린 행동이 누군가에게 배척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그런점에서 사자는 참 불쌍한 동물입니다. 왜냐면 사자는 결국은 패배하는 동물이거든요.

니체의 변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꼭 기억해야 할 동물이 한마리 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용'인데요. 용은 말이죠. 니체 안에서 사회의 관습과 법의 상징으로 등장하는데요. 그들에게 사자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말합니다.


 "나는 너의 뜻을 따르지 않을것이다." 



그러면 용은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그래, 마음껏 저항해라. 그러나 너 역시 스스로에게 자유라는 명목의 틀을 만들어가는 나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너도 날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자는 용에게 강하게 저항하지만, 저항하면 저항할 수록 용은 사자를 우스운듯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사자는 결국 용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성공한 대표님들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사업가들중에도 의외로 '사자'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유를 주장하고, 멋진 목표를 외칩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은 그들이 한 말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는 것이죠. 자유라는 것이 하나의 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자유가 아닌것처럼, 이상 안에 갇혀버린 사자는 지속적으로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외롭고, 행복하지도 않은 메마른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자는 힘겹게 저항하며 투쟁하지만, 스스로의 삶에 조금씩 지쳐갑니다. 






# 웃어라, 욕망하라, 춤춰라. 어린아이처럼.








그렇다면 니체가 가장 최종적으로 원하는 변신은 어떤 동물일까요? 재미있게도, 니체의 변신의 최종단계는 동물이 아닙니다. 바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니체는 궁극적으로 바라야 하는 모습이라 이야기합니다. 니체가 정의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 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놀이터와 같습니다. 그들은 뛰고 싶을 때, 뜁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알고 있는 어린아이를 니체는 격찬하고 있습니다. 사자는 '아니오'를 말할때 으르렁거립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저 웃을뿐입니다. 

사자는 '하고싶다'를 큰 소리로 외치지만, 어린아이는 말하지 않고, 그저 욕망을 실현합니다. 그 중간 과정이 생략된 어린아이는 항상 말보다 먼저 행동하는 법입니다. 그 욕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욕망과는 조금 다릅니다.



 



인간은 말이죠.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결핍된 욕망으로 스스로가 고통받게 됩니다. 순수한 욕망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진정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남이 원하는 욕망을 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세상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점에서 말이죠. 어린아이는 순수한 욕망을 가진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입니다. 이들의 상징어는 

"I am" 입니다. 말그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궁극의 대상이라는 것이죠.




이들 앞에도 어김없이 용이 나타납니다. 관습의 상징인 용은 어린아이를 향해 말합니다.



"너도 종국에는 나에게 굴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용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저 용의 꼬리와 수염을 매만지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을 뿐이죠. 관습의 덩어리는 어린아이 앞에서는 유희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용은 기세 등등하게 어린아이 앞에서 명령을 하고 소리를 치지만, 어린아이에게 용은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이 될 뿐입니다. 결국 용은 어린아이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게 어린아이만이 가진 진정한 힘입니다.






우리는 말이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말이죠. 햇볕아래 몇 시간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놓은 흙 성도 엄마가 '밥먹자'고, 한마디 외치면, 발로 부쉬며 지나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친구와 목숨걸고 다투던 장난감도 시간이 지나면 방구석 어딘지 모를곳에 내 던져 지듯이, 금방 질려버릴지도 모르는 비지니스를 내 삶의 전체라고 착각하지 말고,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은 얼마든지 넘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이처럼 똑바로 인지해야만 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 감정에 온전히 솔직해야하며, 욕망과 사랑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소중한 일상이 가득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아이가 참 좋습니다. 물론 저 역시 세상을 목표에만 매진하여 일상을 찌그러지게 살아가는 과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삶이 하나의 못다한 그림을 그리는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다 말 그림에 뭐가 그렇게 진지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세상을 치열하게만 살아가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시간이 어린아이가 되어, 천진난만하게 웃고, 놀이하듯 일을 하며, 삶을 거룩하게 긍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진정한 변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로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세상이 온통 어린아이들의 천국이라면, 이 세상 이 과연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까?"




저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우리가 니체를 잘못 이해한 거라고 말이죠. 우리는 마치 진화의 방식으로 사람이 변신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낙타도 있고, 사자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을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부분이 낙타가 될지, 사자가 될지, 아니면 어린아이가 될지는 오직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야기 합니다. 당신의 삶의 대부분이 어린아이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순진무구한 당신의 삶을 진정한 당신의 욕망으로만 채워줄것을 니체는 우리에게 간청하듯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내면에 순응하는 낙타가 가득합니다. 어떤 때는 표효하는 사자가 되기도 하고, 순수한 어린아이 처럼 살기도 합니다. 다만 제 삶의 대부분이 어린아이가 되는 환경을 저는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미가 없다면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너무 진지해진다면, 때론 나를 돌아보며, 그런 것들을 아이의 시선처럼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틀이 저를 괴롭힐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할 수 있다." "그건 답이 아니다." "내가 해봤는데 시간 낭비이다." 라는 것들이 저를 힘들게 하더라도, 저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타협하지 않으려는 저의 수 많은 변신의 상처들은 표면으로 보이지만 않을뿐, 하나하나 체험의 벽이 되어 내면에 쌓여가고 있습니다. 그 허물이 하나의 길이 되어 결국 무거운 중력속에서도 춤출 수 있는 자유의 통로를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저는 이 길을 계속해서 가볍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 끊임없이 죽고 또 죽어라. 그것이 변신의 모든것이다.







내 삶에 끊임없이 망치를 들어야 할때가 있습니다. 나를 가로막고, 내 삶을 무겁게 하는 부정을 향해 망치를 들고, 서슴없이 부셔버려야합니다. 이제 무엇을 부쉬고, 파괴한다는 사실이 꼭 부정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위한 파괴. 생성을 위한 파괴가 가진 순수한 긍정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 삶의 대부분을 말이죠. 그런 생성을 위한 파괴로 채워야 합니다. 그것이 변신의 올바른 실체입니다.

경험은 일종의 지금의 내가 느끼는 것이라면, 체험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뱀이 허물을 벗어 던지는 것을 니체는 경험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니체가 말한 진정한 변신의 모습입니다.




니체는 말이죠. 헤겔의 시대성이나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한 사람입니다. 헤겔은 지금의 시대를 쌓여온 과거의 축척물을 토대로 바라보았습니다. 다윈 역시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해가는 과정으로 보았지요. 그러나 니체는 말합니다.



“만약 진화의 모든 과정이 인간을 향한 것이었다면 인간은 결국 완성된 벌레이고, 자기목적을 실현한 원숭이 아닌가? 확실히 너희들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벌레이고 어떤 원숭이보다 더 철저한 원숭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변신은 말이죠. 채워져가는 목적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넘어섬" 이것이 변신의 모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이죠. 매일이 무너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너지기 위해 우리는 내 욕망의 소리에 귀기울여 도전해야 하고, 위험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삶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대가 무너지지 않은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면,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 당신이 직면해야 할 불편한 사실은 당신이 지키기위해 급급한 그 무언가가 언젠가 당신의 발목과 목덜미를 옥죄어 올것이라는 불쾌한 사실입니다.




무엇이 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주는 모든 것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대신 오늘 하루동안 끊임없이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저곳'이 아닌 '이곳'을 바라보며, '경험'하지 말고,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을 새롭게 태어난 사람처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무너지는 한 당신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지는 한 당신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매일을 무너지며 자유를 향해 살아가세요.






“창조하는 자 자신이 다시 태어날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산모가 되어야 하며 해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로, 나 백 개나 되는 영혼을 가로질러 나의 길을 걸어왔으며 백 개나 되는 요람과 해산의 고통을 겪어가며 나의 길을 걸어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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