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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May 21.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27번째 방법

또라이는 변신의 힘을 안다. - 1탄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10년전의 내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우리가 그렇게 변할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은 세상이 그만큼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번 드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고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자기계발에 대해서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취를 위한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 나중에 좋은 일이 있을거라는 믿음 하나를 가지고,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변화하려고 하는지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번 더 힘주어 질문해봅니다.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정말, 잘 변화하고 있나요?


오늘 저는 니체의 생각을 토대로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고, 그 변화하는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보았습니다.





# 니체가 바라본 현대인의 모습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희 순간랩 팀원이 제 이야기에 이미지를 떠올려 그림을 그려본것입니다. 니체가 만약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린다면 위의 그림처럼 그리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얼굴은 얼룩달룩으로 치장되어있고, 키는 난장이 만큼 작디 작으며, 귀는 흉물스럽게 크기까지 이 그림이 과연 어떤 면에서 현대인과 비슷하다고 있을까요?





우선 얼굴에 눈코입이 없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니체는 말합니다. 당체 현대인에게 교양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말이죠.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것은 스스로가 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인이 등에 흘리고 있는 땀방울을 빨아먹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얼굴조차 그리지 못합니다. 이것저것 배우기 위해, 덕지덕지 붙은 누군가의 조각들을 모을뿐이죠. 스스로의 얼굴도 가지지 못한채, 교양의 찌거기를 받아먹는 창조성 없는 그들을 니체는 차갑게 이야기합니다.



기형적인 큰 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계속 니체의 이야기를 들여봅니다. 니체는 소위 사회에서 인정받고있는 전문가 집단을 혐오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지식이 세상의 전부인것마냥,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대부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현대인은 돈, 명예, 전문지식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바꿔 갑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본다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시인이나 깊은 성찰을 가진 소수의 사람일뿐 대부분은 스스로가 보기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니체는 그런점에서 실제로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아주 작은 장애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협소한 시각으로 세상을 판단해버리는 전문가 집단들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장애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귀만 커질대로 커진 사람들, 눈만 커질대로 커져버린 사람들, 입만 기형적으로 커진 그들. 니체는 그들을 가리켜 '전도된 불구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이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들, 스스로의 장애를 인지조차 못하고 돌보지 않는 이들을 니체는 냉철하게 바라봅니다. 







현대인들의 키는 왜 이렇게 작아진것 일까요?

니체는 우리에게 춤을 추면서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람이 추는 것이 맞죠? 그런데 현대인을 한번 바라보세요. 그들은 춤을 추며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거운 어깨를 축 쳐진채 살아가는 회사원에게 춤을 추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매일을 성과주의에 빠져사는 사업가에게도 춤은 가당치도 않는것 같아요. 그 원인을 니체는 '중력의 영' 이라고 대답합니다. 




중력의 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서 이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천진난만하게 가벼운 삶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어떤 죄악이나 도덕적 관습, 법률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삶은 순수한 욕망의 결정체이었죠. 그때 인간은 끊임없이 춤을 추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옥죄를 가합니다. 계속 자기 삶을 무겁게만 한다는 것이죠. 의무라는 이름으로, 직업이라는 신분으로, 아버지라는 마음으로.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헌신이라는 명목으로 현대인은 스스로의 삶에 무거움을 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삶의 중력에 짓눌려 키가 난쟁이처럼 작아져 버린 것입니다. 키가 작아진 그들에게 중력은 너무 무거워 점프를 하는 것도, 스스로 가벼워지는 것도 그들은 까먹어 버린듯 합니다. 니체는 이런 중력의 영에 의해 춤추는 법 마저 잊어버린 그들을 안타까워 합니다.







#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물론 현대인의 모든 모습을 저렇게 우습고, 냉소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나는 지식을 배워가면서 더 자유로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지식안에 갇혀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가 원하는 진정한 배움을 얻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부품이 되기 위한 덧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부를 하면서 혹은 내가 원하는 자기계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더 사랑하고, 더 안아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스스로 선을 긋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삶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의무와 헌신으로 가득찬 무거운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점점 더 가식적이지 않기위해, 스스로에게 솔직할 수 있는가? 아니면 더 가증스러워지지는 않는가?

나는 세상을 점점 더 공명정대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편협한 시각속에서 판단하기에 급급하지는 않는가?


결국 나는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점점 더 내 삶을 순수하게 사랑하게 되었는가? 







변화에도 기준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더 사랑해지고, 더 가벼워지고, 더 솔직해지는 내가 되기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에는 올바른 변화라는 것이 오직 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과정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변화하면 변화할 수록 더욱 더 자유로워져야 하며, 오직 내 자유가 선행되고 나서 나의 꿈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변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나는 과연 자유롭기 위해서 어떤 변신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니체는 과연 우리의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이 글을 통해 돌아볼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2탄 곧 올라옵니다.)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매일이 지치기만하는 당신이라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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