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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자유리 Oct 08. 2018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40번째 방법.

사랑과 자유는 무엇인가?







#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



"저는 사랑과 자유를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해요. 일명 사바나, 바나나 프로젝트 라고 하죠."

"응 참 신기하구나. 그걸로 먹고 살수는 있니? 

나는 말이지, 사랑과 자유는 너무 잘 알아. 거기에 시간쓰기가 좀 아깝다."





사랑은 그렇게 잘 아는 것이다. 자유는 모두가 느끼고 있다고 확신한다.

사랑을 잘 모르겠고, 자유를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만나기 드문 요즘이다.

그런데 상처많은 사람과 인식이 좁은 사람이 넘친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넘치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방황하는 청년들을 

해마다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가 메말라지며, 그 사랑을 1000만이 넘는 반려동물을 통해 채우려고 한다. 이 사회가 무엇이 문제라고 인지는 하면서 내 삶의 변화는 주저 하는 안타까운 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나도 그렇게 상처받는다.

그렇게 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수 많은 이야기들이 닫혀진다.

나는 그들에게 주고 싶은 사랑과 자유가 퇴색되어감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렇지만,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때가 되어감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들을 조용히 응원한다.




사랑과 자유는 무엇일까?






사실 사바나 프로젝트. 바나나 프로젝트 모두 사랑과 자유의 이야기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것을 할까?

순간랩의 모든 것은 사랑과 자유를 끊임없이 외친다.

늘 이 두가지를 고민하며 여기까지 왔다.



어떻게 사람들이 더 사랑할 수 있고, 어떻게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방법은 있었다.




사랑은 인식의 결과이고, 자유는 감정의 결과이다. 






# 사랑은 인식의 결과이다.






시작은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의 인식이다.

내가 세상을 아는 만큼 나는 세상을 사랑 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꼭 기억하자. 내가 세상을 믿는 만큼 나는 세상을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인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에 반응할뿐이다.

도대체 이 문제는 어디에서 굴러온것이고,

이 문제를 내가 꼭 처리 해야 하는지,

이 문제 자체를 다르게 바라볼수는 없는지..

이렇게 볼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러니 매일이 날이 서서 살아간다.

세상을 바라볼 여유도, 타인을 판단하지 않을 힘마저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는 살면서 문제안에 수도 없이 우리를 가둬둔다. 

스스로를 문제 속으로 가두면, 그 문제는 결코 스스로 해결되지 않는법이다.

결국 나의 모든 문제는 내가 현재 가진 신념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신념을 뛰어넘을 인식을 통해서만 그 문제는 해결될 뿐이다.


말이 어려울 수 있겠다. 이렇게 이야기해보겠다.





세상은 경쟁해야 한다 세상은 생존이다. 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의 관념은 인식은 그것을 기반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돈 문제가 생길때 어김없이 생각할 것이다.

"역시 세상은 생존이야 아무도 날 안도와줄거야."

"인간은 다 이기적이니깐.."

세상을 부정적으로 관념화 한 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부정의 소지는 여김없이 그를 덮친다. 그에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 될까?

그러나 원인은 신념의 강화가 아니다. 세상을 이기적이다를 아무리 강하게 외쳐도 세상은 따뜻하게 오지 않는다. 결론은 나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 

세상은 따뜻한 것이고 생존이 아닌 창조의 것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렇가면 나를 관찰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될까? 나를 관찰하지 않는 사람이 삶의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기억해라. 나를 관찰할때, 나는 나로부터 또다른 분리를 체험한다.

나는 나를 바라볼때, 그 문제로 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타인을 향해 먼저 다가갈 수 있음을 꼭 명심하길 바란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크게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하자.

인간에게는 실존적인 관점과 경험적인 관점이 있다.

실존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때 죽어도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기분이 나쁠때, 인간은 그 기분안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현재의 기분이 곧 내가 되는 것. 결국 이런 관점이 실존주의적 관점이다.

기분이 나쁘면 그냥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실존이니깐.. 그대로이니깐.



그런데 경험적인관점은 다르다.

그것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게 해준다.

경험주의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넌 지금 뭐하고 있어?"

"응 난 지금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하고 있어."


모든 것을 경험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한발자국 뒤에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해진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심리학 박사가 있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린 말이죠. 자극에 반응할 뿐입니다. 기분이 나쁘면 기분이 나쁜 행위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말이죠.
자극과 반응사이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습니다. 이 틈새로 자유의지를 부릴수가 있어요.
자극이 오는데 반응하지 않는거죠. 대신 그 자극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우린 선택할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사랑은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힘이다.

그런 사랑의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실존이 아닌 경험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고 느낄 수 있을것이다? 그게 무슨차이인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지금 구름을 보면서 이건 하늘이야 라고 착각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인식의 범위를 키워갈 수록 인간의 잠재력은 엄청나게 성장 할 수 있다.

결국 나를 규정짓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한, 나는 누구만을 사랑하며 살아 갈 것이다.

내 규정을 부쉬고 상징을 깨트려나갈때, 나의 작은 세계관을 부쉬어 나갈때 나는 조금씩 누구나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해본적 있는가?

우리 인간이 언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고 사는지.

사람은 독특하다. 자신의 모습 안에 쓸데 없는 너무 많은 상징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닌다.

그리고 삶이 무겁다고 쉽게 이야기한다. 주렁주렁 매달린 그것들을 바라보고,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관찰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쉽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무 바뻐서.. 그럴 시간이 없어."

"그거 해서 뭐가 좋은데?"



그리고 우리는 사회가 양상하는 그럴싸한 가치를 찾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사실은 그런것들이 위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알게 될 것이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가치는 타인의 똥보다도 못한 것이라는 사실을.

남이 생산한 비료를 덕지덕지 내몸에 바르면서 우리는 이것이 맞는 것이고 나는 틀렸다고 끊임없이 외친다. 모든 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세상은 아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있다.

혹시 그 사실을 아는가?

빙하에 녹은 퇴적물이 바다 아래 깊숙이 쌓여간다. 노폐물 같은 쓰레기가 해저변에 수천만톤이 쌓여있다.




과학자 그 누구도 이 이유를 알길이 없다. 환경오염의 탓이라 여길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과학과 인류의 인식이 넓어지면서, 우리는 깨닫게 되었다.

쌓여진 노폐물이 오랜 시간이 지난뒤, 바다가 말라 사막이 되었을때, 열대우림이 생기는 최초의 영양분이자 비료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교한 우주의 배열과 질서는 우리가 세세하게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인간은 인식의 한계가 올때, 결정해야만 한다.

정교한 우주의 시스템을 믿을 것인지, 평생 눈에 보이는 것만 매달려 살것인지..

당신이 밥한끼 먹을때 나오는 쌀 한톨도 당신이 전혀 관련없다고 믿는 어떤 아저씨의 피와땀이 담겨져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감탄하려고 할때 그렇게 사랑은 쉽게 싹이 트는 법이다.

그렇게 사랑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사랑의 범주를 깨고, 더 넓고 드 넓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사랑한다고, 너를 위해 살겠다고 외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그렇다면 자유는 무엇인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깨달아간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음을 말이다. 어쩌면 자유의지 자체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있는 지경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나의 생각을 더 강화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 이것은 꼭 기억하자.


상처받은 이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징으로만 규정된 그에게 자유는 한낱 사치품에 불과할 뿐이다. 

더 높은 곳을 향해서만 바라보는 당신의 눈에 사라져가는 감각의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자유는 무의미이다.






아쉽게도 자본주의는 어떠한 가치관도 없는 체제이다.

기계가 무언가를 생산한다. 촘촘하게 정비된 공간에 아직까지 기계가 침범하지 못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 구멍을 인간으로 대체한다. 인간은 기계의 공식에 맞게 끊임없이 자기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좀 더 멋진 부품이 좀 더 멋진 공간과 댓가를 얻는다. 이런 자본주의는 원초적으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 시스템이다. 메마르고, 아주 건조한 체제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수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이곳까지 왔다. 그것이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의 체제를 지향하는 교육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고, 남을 누를수 있을때만이 내가 더 얻을수 있다는 흔적을 내 무의식 속으로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 댓가로 얻는 많은 것들이 존재했다.

우리는 돈을 벌어 편리를 얻었고, 약자와의 비교우위를 체험했으며, 인간관계의 승리를 물질적으로 체험 할 수 있게 되었다.

비싼차를 타고, 좋은 집을 살면서, 타인의 속물적 판단 속에서 나의 존재를 과장하는 작은 도구들을 쟁취하는데 수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다.




# 그런데 자유는 타인의 인정이 아님을. 




내가 자유를 연구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당신에게 주시한다.

자유는 스스로의 가면을 벗어,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온전히 자유를 얻을때, 온전한 나를 만나는 감각적 행동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유는 당신의 상처를 깨닫지 못하면 절대 느끼지 못한다.

자유는 당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당신의 것이 되지 못한다.

자유는 당신이 지금껏 누려왔던 소소한 욕망의 찌거기와 구분해야 한다. 




자유는 소비가 아니다. 당신이 물건을 살때 느끼는 만족감이 자유의 전유물이 아니다. 

당신이 무언가 되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는 당신이 태초의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그래서 당신은 제일먼저 당신이 너무나도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부모로부터 받아온 잘못된 교육과 통념을 그 잘못됨을 느껴야 한다.

뭔가 삶이 공허함이 반복되어 온다는 그 아픔을 감각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런 설명을 해주고 싶다.

작은 병이 있다. 이 병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병안에 진흙을 쑤셔넣었다.

어떤 인간은 이 병이 깨져있다.

어떤 이는 이 병이 내용물로 넘쳐 흐른다.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내 병이 스스로 온전하다고 이것이 맞다고 착각한다.

그러니 세상을 딱 그렇게 만 보는 것이다.

깨진병으로 보는 세상은 깨져있다. 그러니 남들도 깨진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자유의지가 나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진흙이 넘치는 유리병으로 세상을 투영하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무겁다.

무겁고 너무 무거워서 삶이 싫어진다.

삶은 힘든것이고 고난의 연속이라고 생각할뿐이다. 

그에게 자유의 삶은 사치이며, 소수의 소유물이 된다.

어떤 이의 병은 흘러넘친다. 머리로만 아는것이 넘치는 그의 삶은 언제나 척이다.

아는척, 있는척, 괜찮은척.. 머리로 세상을 아는 이에게 자유는 너무나도 쉽다.

머리로 이해했기에, 자유의 개념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에게 미소한번 먼저 준적 없는 삶을 산다.






그렇다.

자유는 당신의 감정을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한, 당신의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졌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이 자유이다.

자유를 향해 가기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기존의 세계관을 깨고, 새로운 세계관을 맞이할 용기.

내가 세상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당신의 유리병이 당신의 세상을 온전히 투영하게 바꿀 용기.

그 용기만 있다면 당신은 태초부터 존재해 온 당신의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안다고 말 하지마라.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를 잘 알아. 그러니 나의 자유와 사랑은 내가 잘 알아."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나는 한마디의 대화도 하고 싶지 않다.

수천년전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도 스스로를 모른다고 대답했다. 당신이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면, 장자가 전해준 한가지 메시지를 남겨본다.




장자 추수편의 고사 


우물안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해줄 수 없다.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우물이라는 공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한 여름만 살다가는 곤충에게는 찬 얼음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없다. 곤충은 자신이 사는 여름이라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편협한 지식인에게는 진정한 도의세계를 설명해줄 수 없다.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르침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병든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잃어버려가는 수 많은 가치들속에 당신만은 온전히 자유롭고 사랑하며 산다는 착각을 버리기 바란다.

함부로 나를 안다고 생각하지 말자. 당신이 진짜 공부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죽는날까지 함께 해야할 당신의 몸이고 감정이고,생각이고, 인식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이 무슨일을 하던지, 가장 먼저 나를 공부하기를 바란다.







# 자유하라. 사랑하라. 그것이 전부이다.


자유는 감정이다. 감정의 상처를 치유하며, 온전한 나로 돌아올때 느껴지는 기분이 자유이다. 쉬운것이 결코 아니다. 자유를 평생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감정을 터트리는 일은 결단코 쉬운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유없는 삶은 별없는 하늘이고, 햇살없는 오후이다. 당신의 삶의 공허함은 비자유가 아닌 무자유의 결과임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사랑은 인식이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세계의 가치관을 온전히 담을때 바라볼 수 있다. 대상의 사랑이 아님을, 사랑은 온전히 내가배워야 할 능력이라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인식의 영역을 키워 당신의 자아를 파괴할때, 당신은 언어적이지 않은 행동의 사랑을 하는 진정한 사람이 된다. 사랑의 원동력은 행위의 원천이 된다. 사랑없는 행위는 영혼없는 메아리일뿐, 당신 삶의 영혼은 진정한 사랑을 향한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그리고 자유하라. 당신의 사랑과 자유가 당신의 세상을 당신이 만들어갈 그 작은 세계관을 키워줄 것이다.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곁에서 언제나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소중한 사랑이, 누구로부터 쉽게 영향받음을 쉽게 난도질 당함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길 바란다.



나의 친구여, 당신의 삶을 나는 오늘도 진심으로 응원한다. 당신의 상처를 어떠한 판단없이 바라보고, 당신의 작은 인식을 누구보다 소중하게 품어주고 싶다. 당신의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짐에, 풍요로워짐에 당신의 시간을 쓰기를 바란다. 

삶은 그렇게 당신 곁에 따뜻하게 있음을 기억하길. 그것이 전부임을 다시한번 떠올려보길. 




성북동에서 진심의 햇살을 담아 자유리가.

 



<조금이라도 영감이 있었다면, 구독과 좋아요는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됩니다.>





삶의 기복이 심한 당신이라면 진심으로 추천합니다. 

http://bit.ly/바나나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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