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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Oct 01. 2018

속 빈 페트병

지하철 1호선 외대앞 역이었다. 열차가 정차하여 숨을 고르는 사이 속 빈 페트병 하나가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광운대행으로, 일찌감치 청량리와 회기에서 승객들을 덜어내고 운행을 마무리해가던 차였다. 듬성듬성 앉은 승객들도 각자의 차례를 기다리며 나설 채비를 했다.


열차는 다시 출발했다. 빈 속의 페트는 흔들리는 열차 안을 텅글텅글 굴렀다. 누군가 급히 갈증만 달래고 아무 곳에 버려둔 모양이지. 갈 곳 잃은 페트병 신세가 어디 그의 탓이겠냐만 페트는 바로 열차의 불청객이 되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승객들은 곁눈질로 휘청대는 그와 자기 발끝 간의 거리를 쟀다.


구르고 굴러 페트는 까만 구두 한 짝에 머리를 댔다. 희끗한 머리의 아저씨는 난처한 표정으로 본인 발에 기대오는 그를 내려보았다. 건너편에 앉았던 나는 그냥 아저씨가 그를 발로 툭툭 밀어내겠거니 생각했다. 열차가 곧 운행을 마칠 터이니 아마 그 때 가서 역할 맡은 누군가가 페트를 치우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발 대신 손을 뻗으시더라. 그리고 구두에 치대는 페트를 집어올렸다. 여전히 언짢은 기색으로 한번 옆자리에 밀어두시더니 결국 다시 손으로 가져가셨다. 아마도 본인이 곧 열차를 내릴 터이니 가는 김에 길 잃은 페트도 데려가자 생각하셨을 게다.


나도 곧 내릴 때가 되어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벌써 가을 바람이 제법 시리다. 텅글거리는 페트를 페이지 너머로 힐끔대던 내 곁눈질이 떠올라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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