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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Jul 17. 2020

어린 왕자

지난 월요일 대학로 중고서점에 갔다.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싶었다. 서점 검색대에서 찾아보니 1990년대에 나온 책, 2000년대 초에 나온 책, 여러 권이 있었다. 제일 위에 뜨는 두 권으로 위치를 출력했다. 출근길에 읽을 참이라 가벼운 책으로 고르고 싶었다.


하나를 찾았다. 기대하던 것보다 크고 두꺼웠다. 표지도 딱딱했는데 오래된 중고서적이라 모서리 부근은 물렁해져 있었다. 딱 동화책이군. 펼쳐보니 글씨도 크고 그림도 큼지막했다. 그런데 문체는 오래된 번역투로 표지만치 딱딱하더라. 동화책이라고 구색만 맞춰놓은 듯해 우스웠다. 스무 살 때 아껴입던 카라티 오랜만에 꺼내 입은 아저씨 같달까. 


다른 하나도 찾았다. 이번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책이었다. 표지 소혹성에 서있는 어린 왕자의 모습이 작은 액자처럼 걸려있었다. 펼쳐보니 글씨도 작고 문체도 훨씬 부드러웠다. 어린 왕자를 찾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었다. 그런데 너무 곱상하달까. 좀 더 투박하고 담백한 모습을 상상했었다. 


어떤 책으로 사야하지. 첫 장부터 두 개의 책을 번갈아가며 읽어보았다. 딱딱한 책에서 하나의 긴 호흡으로 옮긴 문장이 곱상한 책에서는 여러 개의 짧은 문장으로 나뉘어 있었다. 딱딱한 책에서 평서문으로 옮겨놓은 문장이 곱상한 책에서는 따옴표 안에 들어가 목소리를 냈다. 


가방에 넣어두었다가 출근길 꺼내 읽기에는 당연히 곱상한 책이 편할 텐데, 왠지 딱딱한 책의 호흡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 아저씨라 그런가. 오히려 부드러운 어린 왕자가 너무 동화 같아서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쩐다.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그 친구에게 물어볼까? 너는 누구의 번역서를 읽었느냐고. 아니면 검색을 해볼까? 누구의 번역서가 더 저명한지. 어느 출판사의 책이 가장 잘 팔리는지.


나도  구제불능이구나. 정말 구제불능이야. 아프리카 사막 한 가운데 떨어져도 나는 이러고 있겠군. 어린 왕자를 만난들 꺼내 보여줄 보아뱀 그림도 없겠어. 나는 기억 속 어린 왕자 그리기를 그만두고 가방을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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