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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Aug 16. 2020

그는 길을 나섰다. 오늘도 그는 익숙한 식당으로 가서 익숙한 음식을 시켜먹었다. 그리고 “정말 맛있네요.” 식당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값을 치르고 식당을 나와 그는 왼쪽의 익숙한 내리막길과 오른쪽의 낯선 오르막길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오늘은 이쪽으로 올라가 보자. 새로운 카페를 만날지도 몰라. 밖으로 너른 창이 나있는 곳이라면 좋겠어. 그 창가에 자리가 남아 있다면 더 좋겠지.” 길을 오르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세차게 비가 내린 뒤라 하늘은 약간 흐리고 거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길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저 굵은 나무들 안에 분명 셀 수 없이 많은 나이테가 있겠지.' 그는 넓은 동심원을 떠올렸다. 나뭇잎에 맺혔던 물방울 하나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왼편으로 두 명의 동상이 보였다. 여학생들 같았다. 한 명은 바닥에 앉아 세계지도처럼 펼쳐진 커다란 책을 부여잡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그 곁에 등불을 들고 서서 허리 숙여 그 책을 비추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을 쫓으며 그녀들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르막길은 금방 끝이 났다. 새로운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길은 다시 낮고 익숙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여러 개의 길이 만나는 작은 로터리였다. ‘길이 이렇게 이어지는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자동차 한 대가 로터리를 따라 돌아 가로수 우거진 언덕길로 빠져나갔다. 의 앞에는 다시 익숙한 길들이 남았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익숙한 길 각각의 끝을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가장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곱게 휜 돌담길이었다. 그는 오래전 그 길에서 보았던 마술사를 떠올렸다. 마술사는 어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높다란 돌담을 등지고 서서 오가는 이들에게 카드 마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소년은 어렸지만 분명 훌륭한 마술사였다. 소년은 자신의 재주가 누군가의 발걸음과 시선을 붙잡아 놓는다는 것만으로 싱글싱글 빛을 냈고 사람들은 그 빛에 홀려 미소를 짓고 박수를 쳤다. 


오늘은 비가 왔고 거리의 마술사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선을 그리며 쭈뼛 솟은 유칼립투스 잎들이 그의 눈에 들었다. 그는 그렇게 높게 자란 유칼립투스를 처음 보았기에 그 작고 단단한 잎을 올려다보는 일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큰 광장을 지나서 그는 처음 식당을 나서며 익숙한 길로 걸어 내렸다면 쉽게 닿았을 거리로 들어섰다. 그 거리에는 그에게 꽤나 익숙한 카페 하나가 있었다. 움푹움푹 고인 웅덩이들을 피해 걸으며 그는, 멀리 돌아온 셈이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 자신의 원이 조금은 넓어진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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