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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Sep 06. 2020

태진

"일어나세요. 거기 앉으시면 안 됩니다." 


태진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오며 외쳤다. 커플 하나가 돌계단에 나란히 붙어 앉아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태진은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슴을 잔뜩 부풀리고 씩씩대며 걷는 모습이 꼭 성난 불도그 같았다. 커플은 태진의 외침에도 서너 번 더 셔터를 누르고는 태진이 가까워지자 벌떡 일어나 잰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대며 입모양으로 태진의 외침을 흉내 내자 여자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태진은 터져 나오는 화를 꾹꾹 누르며 키득대는 커플의 등에 대고 다시 한번 외쳤다. 


"문화재에는 앉으시면 안 됩니다."


태진은 주변을 서성이는 잠재적 훼방꾼들과도 눈을 마주치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꼭 저 돌계단에 앉아 사진을 찍으려 했다. 방금 전의 커플도 이미 여러 번 태진의 엄포를 들은 뒤였을 것이다. 물론 태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문화재에는 앉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태진이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있자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사무실로 돌아가며 태진은 자신이 본래 화가 많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에는 퉁퉁한 몸집에 비해 숫기가 없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 놀려먹기 좋은 타입이라 같은 반 녀석들이 짓궂은 장난을 자주 쳤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난들을 실실 웃어넘겼고 그래서 태진은 학교에서 나름 착한 놈으로 통했다. 서른 넘어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도 그는 또래 여신도들에게 "태진 씨는 사람이 참 순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렇게 분에 겨워 씩씩대는 꼴이라니. 사무실 입구 벽에 걸린 기다란 거울로 미간에 힘이 잔뜩 들어간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처럼 순했던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쉽게 화를 내게 되었는가 생각하니 그는 더욱 약이 올랐다.


정확히 말해 그가 화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돌계단에 앉는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저 돌계단에 앉고 싶어 했는데, 그들에게 그 돌계단은 문화재이며 그렇기에 그곳에는 함부로 앉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돌계단에 앉으려 하기 때문에 자신도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정도는 태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화나게 하는 건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허수아비 취급했다. 자신에게 "문화재에는 앉으시면 안 됩니다."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아니 적어도 태진 자신과 눈을 마주쳤던 사람들은 그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놈의 돌계단에 앉으면 안 되지 않을까? 자신이 제재했던 사람이 다시 돌아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정말 허수아비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순하다 해도 나도 사람이란 말이지.' 그는 자신이 허수아비라면 사람들은 참새도 아닌 비둘기들 같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기는커녕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비키곤 고개를 까딱대며 흐리멍덩하고 동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비둘기들 말이다. 


태진은 양손을 허리에 얹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렇게 화가 나는 것도 자신이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 퇴근까지는 한참이 남았다. 그는 CCTV 화면 4개를 차례로 훑어본 뒤 낡은 가죽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던져둔 휴대폰을 들어 CCTV 앞 휴대폰 거치대에 정성껏 올렸다. 방금 뛰쳐나가기 전까지 그는 휴대폰으로 5년 전쯤 개봉했던 할리우드 액션 영화 하나를 보고 있었다.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도심을 헤집으며 경찰들과 치열한 추격전을 벌이던 중이었다. 꽤나 흥미진진한 장면이었는데 훼방꾼들 때문에 흐름이 끊겨버렸다.


태진은 의자 팔걸이에 왼쪽 팔꿈치를 얹어 턱을 괸 채 남는 손으로 영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남자 배우가 뒤에 앉은 여자 배우에게 "꽉 잡는 편이 좋을 거예요!"라고 능글맞게 소리쳤다. 오토바이가 격하게 방향을 틀자 뒤를 쫓던 경찰차 서너 대가 연달아 충돌하며 도로를 막아버렸다. 주인공이 등 뒤로 손을 흔들며 유유히 빠져나가는 동안 악당 역의 상대 배우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려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태진은 주인공의 멋들어진 표정을 상상하며 턱을 괴었던 손을 들어 주인공의 손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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