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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Sep 19. 2020

출근길

  금요일 아침 출근하려 집을 나서는 길에 어머니가 껍질째 먹어도 된다며 사과 하나를 쥐어주셨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가까운 편이었고 열차에서는 사과를 먹을 수 없었기에 한동안은 손에 들고 있다가 결국 겉옷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충무로에서 한 번, 양재에서 다시 한 번 갈아탄 뒤 판교역에 도착했다. 이래저래 늦장을 부리다 느긋하게 출발한 탓에 판교역 앞 셔틀버스는 일찌감치 놓친 뒤였다. 밖으로 나와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냈다. 버스 정류장 왼편으로 지각생들을 기다리는 택시 서너 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걷기 좋은 날씨였다. 가을 하늘답게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았다. 사과는 적당히 묵직했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조금 푸석푸석했다. 그래도 발걸음을 서두르지 못하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교차로에서 기역 자로 두 번, 조금 더 걷다 다시 한 번 횡단보도를 건넜다. 곧 화랑공원의 널찍한 광장에 들어섰다. 이따금 주말 오후 출근하며 이 곳을 지날 때면 광장은 늘 북적거렸었다. 보드를 배우거나 자전거 실력을 뽐내는 아이들이 고추잠자리들처럼 맴돌았었다. 하지만 평일 아침에는 텅 빈 1교시의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했다. 요리조리 돌려가며 베어 먹으니 사과는 금방 얇아져 동그랗게 심만 남았다.


  광장을 가로질러 작은 개천을 건너는 다리 위에 올랐다. 다리는 아치형으로 구부러진 모습인데 바닥이 나무로 되어 있어 걸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다리 중간을 건널 즈음 까치 두 마리가 날아오더니 다리 왼편 난간 위에 비스듬히 나를 등지고 앉았다. 신출내기들인지 머리 뒤편 검은 깃털들이 삐쭉빼쭉 솟아 있었다. 늦잠 자고 허둥지둥 등교하여 머리가 부스스할 때면 선생님들은 꼭 '왜 머리에 까치집을 지었냐'는 뻔한 멘트를 하시곤 했다.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다. 아침잠 많은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저 친구들은 이제 막 둥지를 떠나 비행 연습을 시작한 것이려나 궁금했다.


  다리를 벗어나려는데 등 뒤에서 덜컹덜컹 무언가 나무 바닥 위를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전거 같은 것이 쌩하니 지나가겠거니 생각했는데 전동 킥보드 한 대가 천천히 곁을 지나 앞서 갔다. 킥보드 위에는 앞뒤로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아빠와 딸처럼 보였다. 근처 어린이집이 있으니 아마 아빠와 등원하는 길일 테다.


  다리를 지나 오른편으로 돌면 회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왔다. 길은 어른 네댓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폭으로 비스듬히 구부러졌고 벽돌로 채워진 바닥에는 새가 날갯짓 하는 무늬가 장면 장면 그려져 있었다. 길을 따라 양 옆으로 줄지어 늘어선 가로수들에는 손바닥만 한 잎들이 무성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오솔길은 햇살과 이제 막 가을에 물들기 시작한 연두빛깔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빛깔 위로 킥보드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아빠는 파란 캡 모자를 쓰고 딸은 분홍 헬맷을 썼다. 아빠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딸도 아빠의 품 안에 서서 눈높이의 손잡이에 나란히 두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을 실은 킥보드는 오가는 이 없는 오솔길 위를 천천히 달려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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