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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Sep 27. 2020

지호

  "배불러. 얼른 커피 한 잔을 해야겠어."

  초밥집을 나서며 지호가 소희에게 말했다. 둘은 일요일 오후에 만나 느지막이 점심을 먹었다. 지호는 특선 초밥을 먹었고 소희는 연어초밥을 먹었다. 소희는 좋지,라고 답하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소희는 곁눈질로 지호의 뒤를 따르며 초밥집에서 찍은 사진들을 고르는데 집중했다.

  "이쪽으로 가자. 사진은 카페 가서 골라. 카페 가서."

  지호는 소희의 팔을 잡아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9월 막바지의 가을 날씨였다. 거리에는 두꺼운 맨투맨을 입고 나온 사람들과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친 사람들, 여전히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섞여있었다.

  "맞아. 너 요즘 연어초밥 자주 먹더라? 네가 올린 사진들 봤어. 나는 연어 식감이 별로던데."

  지호가 소희의 핸드폰 화면을 힐끗 보며 말했다. 소희는 이제 사진 하나를 정해 크기를 조정하는 중이었다.

  "너무 부드러워서? 나는 오히려 그 부드러운 식감이 좋아. 스윽 삼켜지잖아."

  소희가 아직 입안에 남은 연어초밥의 여운을 느끼며 입꼬리에 힘을 주자 지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람마다 다르지."


  카페는 가까웠다. 커피 맛이 좋아 지호가 자주 찾는 곳이었다. 테라스 자리를 기대하며 왔지만 날씨가 좋은 탓에 테라스에는 이미 사람들이 다 차있었다. 다행히 창가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비어 있어 둘은 그쪽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는 내가 살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 나는 따뜻한 것 마실게. 땡큐."

  지호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묻자 소희가 의자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호가 주문을 하는 동안 소희는 사진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다시 눈 앞으로 핸드폰을 들어 양 팔꿈치를 테이블에 고정한 채 창 밖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다. 지호는 돌아와 소희의 왼편에 앉았다.

  "커피는 사장님이 가져다주실 거야."

  지호는 왼손으로 턱을 괴고 소희가 카메라에 담으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정말 좋기는 했다. 가로수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햇볕을 받아 점점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카페 앞으로 알록달록한 모자를 쓴 남자아이 하나가 아빠의 검지 손가락을 쥐고 제법 능숙하게 걸어갔다. 아이의 아빠는 아이 쪽으로 비스듬히 허리를 숙인 채 아이와 보폭을 맞춰 걸었고 엄마는 빈 유모차를 끌며 그 뒤를 따랐다. 아이는 본인이 걷고 있다는 사실에 한껏 흥이 난 것 같았다.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었다면 지금쯤 저만한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지호는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너무 뻔한 감상이야'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왜?"

  소희가 지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지호는 소희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가 무엇을 묻는 건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본인이 조금 크게 고개를 저었다는 것을 의식했다.

  "아아, 너무 까마득해서. 저 아이한테는 이 거리가 얼마나 크게 느껴질까? 또 어느 세월에 저 애를 기른다니."

  지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자 소희가 웃었다.

  "그렇지. 요즘 같은 시대에 아이 낳아 기르는 사람들 보면 정말 대단해. 난 못할 것 같아."

  지호도 맞아,라고 수긍하며 다시 테이블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커피가 나왔다. 지호가 주문한 아이스커피는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나왔고 소희의 커피는 푸른빛에 초롱꽃이 그려진 커피잔에 담겨 나왔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지호가 다시 운을 뗐다.

  "그런데 말이야.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는 것 같지 않아? 이러다 금방 늙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워. 지금까지 뭐했나 싶기도 하고."

  "음, 뭐를 했었으면 싶은데?"

  소희가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소희의 질문에 지호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튕겼다.

  "글쎄. 뭐를 했으면 좋았을까? 어렸을 때 나는 이 나이 되면 정말 뭔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어. 적어도 '무엇이 되고 싶어?'라든가, '제일 잘하는 것이 뭐야?' 같은 질문들에 시원하게 답할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어. 그냥 어정쩡한 기분이야.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리기는 싫은데."

  지호가 얼음을 와그작 소리 내어 씹었다. 소희는 잔을 살짝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그 표현이 공감되네. 어정쩡한 기분. 그런데 꼭 무언가가 되어야 해? 다 그렇게 사는 거지. 나는 오히려 나이 들고 나서 이제는 그런 질문들 안 해도 되니까 좋던데. 어른이 된다는 게 별건가?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 너는 네가 어른이라고 생각해?"

  지호가 놀라 묻자 소희도 다소 놀랍다는 듯 답했다.

  "당연하지. 우리 나이면 어른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럴 수가. 안돼. 우리라고 하지 마. 나는 어른하기 싫다, 정말."

  지호가 진저리를 치자 소희가 웃으며 맞받아쳤다.

  "뭘 또 그렇게까지 싫어하니? 나이 들어 좋은 것도 있잖아. 조금씩 무뎌지는 건 좋은 것 같아. 이제는 웬만한 일에도 크게 아프거나 상처 받지 않게 된 것 같거든. 그리고 미영이 생각해봐. 미영이 아들이 벌써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간다더라. 학부모야 학부모. 우리 나이가 그렇다니까."

  지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소희의 팔을 꼬집었고 소희는 아야, 소리를 내며 지호의 손을 찰싹 내리쳤다. 지호가 붉어진 손등을 쓰다듬으며 키득대자 소희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지호를 흘겨봤다. 그러다 소희가 지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맞다. 그때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때. 2학년 땐가? 네가 담임 열 받으면 킁킁거리면서 말하는 거 흉내 내다가 걸렸잖아, 담임한테. 너랑 나랑 교무실 끌려가서 엄청 혼나는데, 아 진짜, 담임 계속 킁킁거리고 네가 따라 하는 것 자꾸 생각나서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 그때 웃음 참는다고 손등 백번 꼬집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에라이, 킁, 이 버르장머리, 킁, 없는 것들!"

  지호가 그 날의 대사를 재연했고 둘은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선생님. 잘 지내시려나. 그때는 진짜 싫었는데, 이제는 좀 이해가 되기도 하고. 건강하셨으면 좋겠네."

  지호가 눈가에 웃다 난 눈물을 훔친 뒤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리고 다시 이어 말했다.

  "근데, 소희야. 네가 무뎌진다고 했잖아. 무뎌져서 좋다고. 그런데 나는 무뎌지는 게 좀 아쉬워. 가슴 설레는 일이 없달까. 무언가 하고 싶어서 막 두근거리고 어쩔 줄 모르겠고 그런 기분 있지? 그런 기분을 느껴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어. 뭐랄까. 좀 시큰둥해."

  "왜? 너 그래도 열심히 살고 있잖아. 저녁에 연락할 때마다 매번 회사에서 야근 중이더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일만 하는 것 아니었어?"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지. 지금도 그런 것 같고. 그런데 예전에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이런저런 것들을 포기하거나 나중으로 미뤄도 크게 아쉽지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냥 발버둥만 치고 있는 기분이야. 머리로 달려드는 벌 떼를 떼어내려 막 날뛰는 조랑말 같아. 고개를 위아래로 휘저으면서 이쪽저쪽으로 도망치고만 있는 거지. 숨은 차는데 가슴이 뛰지는 않아."

  소희는 가만히 지호를 바라보며 그가 이야기를 이어가길 기다렸다. 지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유리잔을 바라보다 소희를 향하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질문을 허공에 뱉었다.

  "나는 무엇을 좇고 있었을까?"

  그리고 소희가 되물었다.

  "너는 무엇을 미루며 살아왔는데?"

  지호는 글쎄,라고만 답한 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몇 가지 기억들이 스치듯 떠올랐고 지호는 씁쓸한 기분에 오른쪽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창 밖을 내다보며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깨물었다. 글쎄, 무얼 미루며 살아왔을까. 지호는 속으로 글쎄 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냥 지금까지 미뤄왔던 것들을 해봐. 언제까지 미룰 거야. 얼마 안 남았다, 너."

  소희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제는 미지근해진 커피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지호는 커피를 홀짝대는 소희를 잠시 곁눈으로 쳐다보다 팔을 뻗어 커피잔을 든 소희의 오른쪽 팔꿈치를 살짝 쳐올렸다. 커피를 쏟지 않을 정도로 잔이 살짝 흔들렸다.

  "이 씨, 야!"

  소희가 코에 묻은 커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소리쳤다. 소희가 지호의 등을 내리치려 왼손을 들어 올리자 지호는 움츠러드는 양 허리를 숙이며 오른손으로 소희의 팔을 잡았다.

  "왜 '얼마 안 남았다, 너'야. '얼마 안 남았다, 우리'라고 해야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어? 이 버르장머리, 킁, 없는, 킁, 쏘희야."

  소희가 웃자 지호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한 번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일단 치즈케이크부터 먹자. 여기 치즈케이크가 진짜 맛있거든. 아까 초밥집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 생략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안돼! 나는 아까 진짜 많이 먹었단 말이야."

  소희가 지호를 올려보며 큰일 날 소리 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 조각만 시켜야겠다."

  "뭐야, 너 두 조각을 시키려고 그랬어?"

  소희가 질색하자 지호가 웃으며 주문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일단 먹어봐. 여기 치즈케이크 진짜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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