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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Oct 01. 2020

돼지들의 대화

  "무너졌군."

  돼지 1번이 돌무더기 앞에 서서 말했다.

  "그래. 무너졌어."

  돼지 2번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했다.

  "지난밤 비바람이 거셌던가?"

  돼지 1번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탑의 잔해를 살폈다. 돼지 2번은 속 깊은 곳에서 일어 오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토해내듯, 하지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의 탑이 튼튼하지 않았던 걸 거야. 너의 탑은 무사하니까."

  그의 말대로 돼지 1번이 쌓아왔던 탑은 지난밤의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았다. 돼지 1번은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본인의 탑이 우뚝 서있었다. 비바람이 다녀간 뒤 아침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햇살은 눈부셨고 그의 탑은 하나의 불기둥처럼 밝게 빛났다.

  "탑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지. 하지만 다시 쌓으면 돼. 오히려 부실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가는 기회가 될 거야. 더 높은 탑을 쌓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단단하고 높은 탑을 쌓을 수 있을 거야."

  돼지 1번은 이렇게 말한 뒤 스스로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지만 2번은 말없이 무너진 탑을 응시했다. 탑이 무너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1번은 그 순간 돼지 2번이 느끼고 있을 상실감과 절망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의 탑도 여러 차례 무너졌었지."

  1번은 잠시 기억을 더듬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탑을 쌓기 시작한 건 5년쯤 전이었어. 처음 쌓았던 탑은 1년이 못 되어 무너졌지. 하지만 나름 높고 단단했어. 크고 작은 비바람이 탑을 위협했지만 꽤나 잘 견뎌냈거든. 쌓은 지 반년 정도 되었을 때 나는 나의 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지. 그리고 남은 평생을 꾸준히 쌓아 올리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상상하며 설레곤 했어."

  "별에 닿을지도 모르지."  

  2번이 말했다. 1번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별에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별은 고결하고 아름답지. 맑게 빛나는 진주알과 같아. 소수의 돼지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야. 그런데 어느 날 바람이 불었고 탑이 무너졌어. 순간이었지. 정말 끔찍하게도 짧은 순간이었어. 무너진 탑을 보며 나는 믿을 수 없었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바람일 뿐이었거든. 바닥에 주저앉아 무엇이 문제였을까 생각했지. 답은 뻔했어. 탑을 무너뜨린 것은 나 자신이야. 나의 열정과 의지, 인내심 같은 것들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그 외의 답은 없어. 그것이 진실이거든. 그래서 더욱 괴로웠지."

  2번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미간과 이마를 쓰다듬었다. 1번은 그 모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진정 그 외의 답은 없으므로 2번도 긍정 외에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을 것이라고, 1번은 생각했다.

  "그래. 괴롭지. 탑이 무너지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처음 탑이 무너지고 나를 더욱 괴롭혔던 건 상실감이었어. 결국에는 다시 탑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렇게 탑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도달할 수 있었을, 그 최고의 높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어. 만약 탑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남은 평생 더 높게 탑을 쌓아 올려 별에 닿았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불안하고 조급해졌지. 탑이 무너진 탓에 이제는 남은 평생 동안 다시 쌓아 올리더라도 별에 닿지 못한다면 어쩌지? 그 1년만큼의 높이가 부족한 탓에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되어도 별에 닿지 못한다면 어쩌지?!"

  1번은 순간 절규하듯 외친 뒤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2번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어서 말했다.

  "그건 알 수 없지. 어쩌면 너와 나는 별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이미 놓쳐버렸는지도 몰라. 우리의 탑은 이미 여러 번 무너졌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어. 결국에는 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쌓아온 탑이 무너져 우리는 절망에 빠지지만,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탑을 쌓아야만 해."

  1번이 말을 마치자 2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탑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몇 걸음을 걸어가 1번에게서 멀어진 뒤 다시 돌아보며 그에게 물었다.  

  "정말 그럴까?"

  "무슨 뜻이야?"

  1번은 2번의 질문에 턱을 살짝 내밀며 고개를 기울였다. 2번이 말했다.

  "나는 지금 크게 괴롭지가 않거든."

  "다행이군. 그러면 바로 다시 탑을 쌓을 수 있을 거야."
  2번이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나는 절망하고 싶지 않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탑을 쌓아야지."

  1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2번이 좌절감에 벗어나려 어리석은 길을 택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2번이 답했다.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닐지도 몰라."

  "아니야. 너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2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 나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하지만 혼란스러워. 그다지 크게 괴롭지 않아. 물론 전혀 괴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야. 너의 말대로 스스로 부족했기 때문에 탑이 무너졌다고 생각해. 아쉬워. 부끄럽고. 나 스스로도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조금 후련해. 맞아. 후련해. 그리고 탑은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라고, 적어도 나의 탑은 결국 무너지고 말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돼지 2번은 그 순간에 스스로가 느끼는 것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뒤얽힌 감정들을 제대로 풀어내고 싶었다. 무엇보다 탑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질문들을 쉽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번은 단호했다.

  "탑이 무너진 건 네가 나약했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지. 네 스스로가 별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야."

  2번은 1번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나약해. 탑을 쌓으면서도 의심했거든. 탑을 쌓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나는 별에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별에 닿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어리석긴!"

  1번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뱉은 뒤 강열한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별에 닿기 전까지 우리는 별에 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많은 돼지들은 생이 다하는 날까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지. 오직 소수의 돼지들만이 진주빛의 고결한 별에 도달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어떤 돼지들은 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해. 별을 이야기하는 돼지들을 모두 사기꾼으로 취급하지. 하지만 그런 작자들은 별빛의 고결함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야. 스스로가 나약하다는 것을, 그래서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 패배. 나는 패배했어."

  2번은 마음속 질문에 대한 단초를 찾았다. 2번이 1번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탑이 무너졌고 나는 패배했어.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승리하려고 하기에 결국 패배하는 것 아닐까? 탑을 쌓으려 하기에 결국 탑이 무너지는 것 아닐까? 탑을 쌓지 않으면 탑은 무너지지 않아. 내가 무언가와 대결하여 승리하려 하기에 결국 패배하는 거야. 어느 날은 승리하겠지. 하지만 어느 날은 패배할 거야. 승리는 달콤하지만 패배는 고통스러워. 탑을 쌓는 일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무너진 탑을 보는 것은 우리를 절망하게 해. 탑 쌓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다시 또 무너진 탑 앞에 서서 절망하게 될 거야."

  1번은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네 생각은 틀렸어. 우리는 별이 있기에 탑을 쌓으려고 해. 하지만 나약하기 때문에 탑이 무너져 내리지. 우리는 대결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것이 있기에 승리하려고 해. 하지만 부족하기 때문에 패배하는 거야.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해. 그리고 단단하고 높은 탑을 쌓기 위해 더 강한 의지와 믿음을 가져야 하는 거야."

  돼지 2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1번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맞아. 네 말이 맞아."

  2번은 잠시 무너진 탑을 바라보며 그의 탑이 무너지기 전 가장 높이 닿았던 위치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더 높이 고개를 들어, 그가 오늘부터 다시 탑을 쌓아 올린다면 그리고 앞으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의 탑이 닿을지도 모르는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높군."

  2번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뱉은 뒤 이번에는 몸을 돌려 언덕을 내려가는 완만한 비탈길을 내려다보았다. 길은 평지에 이르러 이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뻗어 들어갔고 그 끝을 알기 어려웠다. 그는 1번에게 말했다.

  "나는 일단 걸어보려 해."

  1번은 아무 말 없이 2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2번이 이어 말했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가 보려 해. 지금까지 탑에 돌을 하나씩 쌓아 올렸던 것처럼 말이야. 비바람이 불면 탑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대신 잠시 나무 아래에 서거나 동굴로 들어가 비바람이 그치길 기다릴래. 어느 날에는 꼼짝없이 비를 맞고 쫄딱 젖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해볼래."

  2번이 걸음을 떼려 하자 1번이 물었다.

  "별에 닿지 못할까 두렵지 않니? 그 상실과 절망이 두렵지 않니?"

  2번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두려워."

  2번이 1번을 돌아보자 1번은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2번이 고개를 저었고 1번은 자리에 멈추었다.

  "두려워. 하지만 두렵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늘 비바람과 맞서려 했어. 아니 맞서야 했지. 나는 탑을 쌓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비바람이 불 때마다 불안했어. 탑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했지. 탑이 무너지면 나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나약함과 마주해야 했으니까. 물론 어느 날은 정말 거센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았지. 그런 날이면 비바람은 조금 더 강해진 나를 증명해준 셈이었어. 맞아. 어느 날은 패배했지만 어느 날은 승리했어. 패배가 있었기에 승리도 있었던 거야. 정말 언젠가 나는 별에 닿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말이야. 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탑이 무너질지도 몰라. 별에 닿기 직전에 탑이 무너질지도 모르지. 정말 미약하게 부는 하룻밤의 비바람에 말이야. 그러면 나는 다시 비바람과 나약한 스스로를 저주하게 되겠지."

  2번은 잠시 말을 멈추고 1번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1번이 자신의 말을 인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해. 너의 말대로 나는 정말 어리석구나.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기 두려워 진실을 부정하고 있는지도 몰라. 하지만 이번에는 탑을 쌓는 대신 걸어보려 해. 그러면 비바람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어쩌면 비바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내게 길을 안내해줄지도 모르지."

  1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소리. 별에 닿으려는 돼지와 비바람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어. 비바람은 우리가 별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두 눈을 가려버리지. 비바람의 속삭임에 익숙해지다 보면 너는 이내 별빛의 고결함을 외면하게 될 거야. 그리고 탑을 쌓는 돼지들을 사기꾼들이라 비웃기 시작하겠지."

  2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인사말을 나누었다. 

  "별빛의 고결함을 잊지 않을게. 물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지만. 어디를 걷든 별에 닿고자 하는 너의 강인한 의지를 잊지 않을게. 비록 나는 별에서 멀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 행운을 빌어. 별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도 간직하길. 그리고 네가 걷는 길에 별빛이 함께하길 바랄게."

  돼지 2번은 비탈길을 걸어 내려갔다. 돼지 1번은 2번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고 다시 몸을 돌려 맑은 하늘 아래 붉게 빛나는 자신의 탑을 향해 걸어갔다. 돼지 2번은 평지에 다다랐고 금세 우거진 나무들 사이 뻗은 길로 들어가 몇 걸음만에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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