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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Oct 10. 2020

한수

  며칠 전 한수에게 30년 전의 자신이 찾아왔다. 한수는 고등학교 동창 둘과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기에 돌아보니 거기에 젊은 시절의 자신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한수도 긴가민가했지만 자신을 알아보겠냐는 그의 질문에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수는 젊은 시절의 자신과 잠시 걷기로 했다. 젊은 한수는 자신이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했다.

  젊은 한수는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이 궁금해 찾아오게 되었다며 '아저씨'가 바로 자신을 알아보아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어렵사리 성사된 만남에 반가움을 표하면서도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몇 가지 질문이 오가는 동안 젊은 한수는 한수에게 "그러니까 정말 아저씨가 김한수 씨 맞는 거죠?"라고 여러 차례 되물었다. 한수는 오히려 그 청년이 젊은 시절의 자신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젊은 한수가 나이 든 자신의 모습에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상상했던 모습과 적잖이 달랐을 테다. 한수는 굳이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 섭섭해하고 있는 그 청년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둘은 버스 두 정거장 정도를 함께 걸었다. 그동안 서로에게 가족의 안부를 묻거나 하는 일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한수는 청년이 던지는 지난 세월에 대한 질문들, 그러니까 젊은 한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30년에 대한 질문들에 답해주었다. 젊은 한수는 한수가 과연 자신의 집을 장만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언제,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 등과 같은 아주 세세한 부분들까지 답을 구해가려 애썼다. 한수는 그러한 질문들에 기억나는 만큼 최대한 솔직하게 답해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실 자신의 삶과 청년의 삶은 무척 다를 것이기에 이 순간 오고 가는 이야기가 과연 이 여행자에게 얼마만큼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한수는 젊은 시절 자신과의 대화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금세 젊은 한수가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혹시 제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을까요?"

  젊은 한수가 물었다. 한수에게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자네는 요즘 어떤 노래를 듣나?"

  한수의 질문에 젊은 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가 이어 말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이맘때쯤이었을 거야. 누나랑 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거든. 널찍한 도로에 차가 몇 대 없어서 우리는 창문을 열고 시원하게 달렸지. 도로를 따라 코스모스가 잔뜩 피어있었어. 오래돼서 낡은 차였는데, 누나는 그때도 참 운전을 잘했지."

  "맞아요. 누나가 운전을 잘하죠. 그런데요? 이런, 혹시 무슨 사고가 났었나요?"

  젊은 한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아니, 아니. 걱정하지 마. 사고가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한수가 젊은 한수를 달랜 뒤 이어 말했다.

  "그때 우리가 노래를 크게 들으면서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누나랑 나랑 둘 다 아는 노래가 한 곡 나왔어. 팝송이었는데, 아아 그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하네. 하여간 우리는 그 노래의 첫 소절을 크게 따라 불렀지. '헤이 쥬드! 돈 메이크 잇 배드~' 그래! 노래 제목이 그거였어. 헤이 쥬드! 그런데 말이야. 우스운 게 누나도 나도 그다음 가사를 모르는 거야. 노래의 음은 아는데 가사를 몰랐던 거지. 그래서 각자 생각나는 대로 단어 몇 마디 어설프게 따라 해 보다가 금방 다시 조용해져 버렸어. 하하. 지금 생각하니 정말 우습군."

  젊은 한수는 한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보채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요? 혹시 그 이야기에 제가 기억해두어야 하는 것이 있어요?"

  한수가 멋쩍게 웃었다.

  "글쎄,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야. 뭐, 자네가 그 노래의 가사를 조금 더 길게 외워둔다면 어떻게 되려나? 그러면 조금 더 좋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꼭 가사를 모르더라도 상관없을 거야. 그 노래에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긴 후렴구가 있거든. '나~ 나~ 나~ 나나나나~' 하는 부분 말이야. 누나와 나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노래가 후렴에 다다르길 기다렸지. 차를 달리며 말이야. 하하. 그 침묵의 순간이 조금 길게 느껴지긴 했던 것 같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어. 곧 후렴구가 나올 거라는 걸. 그리고 후렴이 시작되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큰 소리로 따라 불렀지. 신이 나게 불렀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나~ 나~ 나~ 나나나나~ 나나나나~ 헤이 쥬드~"

  젊은 한수는 그제야 자신이 놓쳤던 질문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수에게 자신이 언제쯤, 어떤 자동차를, 어떻게 사게 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도 한수는 성심껏 젊은 한수의 질문에 답해주었고 한수가 말을 마칠 즈음 젊은 한수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서로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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