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잘 보냈어? 자취 시작하고 처음으로 본가에 다녀온 건가?"
회사 근처 카페로 들어서며 명석이 가람에게 물었다. 둘은 올해 함께 신입으로 입사했다. 부서는 달랐지만 나이가 같아 신입사원 교육 기간 중 빠르게 친해졌다. 평소 이 시간대면 카페는 점심 먹고 나온 직장인들로 바글거렸지만 오늘은 꽤나 한적했다.
"그렇지 뭐. 오늘은 카페에 사람이 많이 없네. 잠깐 앉았다가 들어가도 되겠다."
가람이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고 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자. 어디 먼저 앉아 있어. 뭐 마실래? 나 기프티콘 받은 것 있어."
"오, 좋지.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아휴, 무슨 벌써 따뜻한 아메리카노야? 아저씨세요?"
명석은 장난 섞인 목소리로 핀잔을 주며 주문을 하러 갔고, 가람도 킬킬 웃으며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금방 주문을 마친 명석은 가람 곁으로 걸어와 카페 안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명석이 카페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시간에 이렇게 한산한 것을 보니 다들 오늘 휴가 썼나 보네. 이번 연휴가 휴가 붙여쓰기는 좋았지. 아, 괜히 약 오르네. 가람이 너는 왜 휴가 안 썼냐? 본가 내려간 김에 조금 더 쉬다 오지."
"연휴라고 딱히 할 건 없잖아. 너는 연휴에 가족들하고 뭐했는데?"
가람은 아쉬울 것 없다는 투로 명석에게 되물었다.
"나야 집에서 출퇴근하니까 별다를 것 없었지. 그냥 방에 처박혀서 못했던 게임이나 실컷 했는데?"
명석이 목을 움츠리며 양손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가람은 다시 킬킬 웃으며 괜히 눈이 뻐근하게 느껴져 안경 아래로 손을 넣어 눈을 비볐다. 그때 커피 두 잔이 준비되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 나왔다. 내가 가져올게."
명석이 성큼성큼 걸어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가람은 본인이 다녀오려 했던 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명석이 건넨 머그잔을 받았다.
"오오, 잘 마시겠습니다."
가람의 인사말에 명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본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가람은 김이 나는 머그잔을 들어 올리며 후우 바람을 불었다. 한 모금 마시려면 조금 더 식혀야 할 것 같았다.
"아, 뜨겁다."
가람이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자 명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낄낄댔다. 벌써 반쯤 비워진 명석의 유리잔을 바라보며 가람이 물었다.
"명석아. 너는 어렸을 때 목욕탕 가면 냉탕에서 많이 놀았어?"
"목욕탕? 동네 친구들하고는 냉탕에서 많이 놀았지. 갑자기 왜?"
명석이 얼음 하나를 입에 물고 와그작 씹으며 되물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어렸을 때 목욕탕은 아버지랑만 갔거든. 아버지 따라서 온탕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때만 밀고 돌아왔었어. 아버지는 내 전신 밀어주시고, 나는 아버지 등만 밀어드리고."
"아, 이번에 내려가서 목욕탕 갔다 왔어?"
가람은 손을 저었다.
"아니. 코로나 때문에 목욕탕에는 못 갔지."
명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다시 머그잔을 손에 쥐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뭐 연휴라고 집에 가도 가족들이랑 같이 할만한 게 없더라. 같이 밥 먹고 종일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다 왔어."
"그건 모든 집이 똑같은 것 아니야?"
"그렇겠지? 그래도 이번에 내려가서는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있으니까 지겹더라고. 예전에 부모님하고 같이 살 때는 별생각 없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는 나와서 살아서 그런지 느낌이 조금 다르더라.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거니까 텔레비전만 멀뚱히 보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더라. 이제 나이도 있고, 가족들이랑 같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은 것 같은데 시간 있을 때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드니까."
명석이 뒤로 젖혔던 고개를 앞으로 끌고 오며 코를 훔쳤다.
"그렇지. 직장 다니면서 혼자 살기 시작하면 다시 가족들하고 같이 살기는 어렵다고들 하더라. 그럼 이번에 가족들이랑 뭐라도 해보지 그랬어?"
가람은 괜히 멋쩍어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막상 뭐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계속 텔레비전만 봤어. 우리 집은 지금까지 살면서 딱히 가족들끼리 해본 게 없더라고. 같이 해왔던 것들이 있으면 그걸 하면 되는데, 밥 먹고 텔레비전 본 것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더라. 다른 집들은 어땠을지 모르겠는데, 우리 집은 여행을 다니거나 그랬던 것도 아니라서.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게 주말에 이따금 아버지랑 목욕탕 갔던 거야."
명석이 공감한다는 듯 다소 과장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 부모님 세대는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 쉬었잖아. 야 씨, 생각해봐. 지금 주 5일 일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때는 더 힘들었을 것 아니야. 시간 내기가 쉽지 않지. 당연한 거야."
"맞아. 당연한 거지."
가람도 명석의 말에 크게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맞지'하는 소리와 함께 가람의 끄덕임이 사그라드는 동안 명석은 잔을 들어 남은 커피와 얼음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가람이 다시 명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게임 좋아하니까 나중에 자식들이랑 같이 게임하면 되겠네."
"아, 그러면 완전 좋지. 그런데 일단 돈 좀 벌어보고."
명석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가람도 씩 따라서 웃었다.
"많이 벌어야겠네."
"많이 벌어야지."
가람은 명석의 호응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 이제 막 식기 시작한 머그잔을 들고 주문대로 걸어가 남은 커피를 다시 종이컵에 받아왔다. 명석도 벌떡 일어나 셀프바에 빈 잔을 가져다 놓은 뒤 카페 입구로 앞장서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