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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자헌 Jan 27. 2022

재형

"아니 근데, 지금도 행복하고 나중도 행복할 수는 없는 거야? 왜 꼭 나중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해?"

재형은 본인이 한 말에 스스로도 성이 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바람에 구르던 광고지를 발로 걷어찼다. 상희는 그의 어설픈 발길질이 우스워 낄낄댔다.

"그게 말처럼 쉬워? 너 또 퇴사 타령이지? 그냥 적당히 다녀라. 은퇴했을 때를 생각해."

상희가 달래듯 말하자 재형은 다시 투덜거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냐. 진짜 아닌 것 같아. 평생 이렇게 살까 봐 겁난다. 요즘 들어 머리도 엄청 빠진다고."

좁은 골목을 따라 찬 바람이 거센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스쳐갔다. 상희가 걸음을 재촉하며 말했다.

"그 정도야? 그러면 그냥 그만둬야지. 퇴사해. 근데 네가 머리 빠지는 건 그냥 유전자 탓이야."

재형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진짜 진지해. 요즘 드는 생각에, 우리는 그냥 미루는 방법만 배우면서 산 것 같아. 근데 우리 잘 가고 있는 것 맞냐? 그 곱창전골집 어느 쪽이었지?"

"이 길 맞아. 저기 왼쪽 골목에서 꺾으면 돼."

상희가 앞서자 재형도 걸음을 재촉하며 말을 이었다.

"개미와 베짱이 동화 보면 교훈이 그렇잖아. 지금 부지런히 안 살면 나중에 늙어서 후회한다. 맞지? 베짱이가 겨울에 먹을 게 없어서 후회하다가 개미를 찾아가잖아. 먹을 것 좀 달라고. 그래서 개미가 받아줬었나? 아무튼 솔직히 나도 겁나니까 그냥 버티는 거거든. 나중에 늙어서 베짱이처럼 되기 싫으니까."

"그렇지. 나도 똑같지 뭐."

상희가 맞장구를 치니 재형 목소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 작년 겨울 만났을 때 내가 너한테 똑같은 이야기하지 않았냐? 이렇게 살다 하고 싶은 거는 언제 해보냐, 평생 이렇게 살다 갈까 봐 겁난다, 그리고 요즘 들어 머리 빠지는 것 같다고 말이야. 젠장!"

상희가 낄낄대며 재형을 놀렸다.

"그러네. 변한 건 더 깊어진 너의 이마 라인뿐이네."

재형이 이마를 문지르며 성을 냈다.

"망할, 맞아. 정말 하루하루가 다르다니까. 내가 그러니까 더 하는 말이야. 이렇게 다음으로, 다음으로만 계속 미루다가 언제 제대로 하고 싶은 것 좀 하면서 살아보냐?"

"그러면 너는 뭐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상희가 되묻자 재형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재형이 외투의 지퍼를 만지작대다 말했다.

"좋은 질문이네... 사실 별 건 없는 것 같아. 그냥 뭐 가끔 여행 다니고, 운동도 좀 꾸준히 하고, 부모님 더 나이 드시기 전에 같이 시간도 많이 보내고, 그런 것들? 나중에는 작은 가게나 하나 차려볼까 싶기는 한데."

상희는 재형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그럼 지금부터 해. 가게는 나중에 차린다고 하더라도, 다른 건 네가 틈틈이 시간 내면 되잖아."

"맞아. 사실 그래."

재형이 조금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주위를 살폈다. 찾아온 전골집이 보였다. 가게 입구에서부터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저기 있다. 아, 대기줄이 있네. 몇 팀 안 되어 보이는데, 그냥 기다릴까?"

재형의 물음에 상희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답했다.

"오늘 같은 날씨에는 곱창전골 먹어야지. 기다리자."

"오케이. 잠깐 기다려봐. 내가 들어가서 이름 적고 올게."

재형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상희는 가게 앞 등유난로 곁으로 가서 손을 녹였다. 재형은 금방 돌아왔다.

"오늘 진짜 춥긴 하다. 그래도 곧 자리 날 것 같아."

상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동안 난로의 붉게 달아오른 부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형아. 그런데 나는 반대로 요즘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래? 네가?"

재형이 되묻자 상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응. 딱히 없어. 평일에 어쩌다 일찍 퇴근해서 갑자기 시간이 생기면 오히려 붕 뜨는 느낌? 그러면 그냥 친구들 연락해서 술 한 잔 하고 들어가면 되니까, 뭐 좋기는 한데. 그런 날 문득문득 드는 생각은..."

상희가 다시 말을 고르며 뜸을 들이자 재형이 문장의 빈 부분을 채웠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회사도 안 다니면 뭐 하면서 살까?"

상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분명히 예전에는 하고 싶은 게 많았어. 그래서 그때는 일단 취업해서 돈 좀 벌고 나면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살겠지 생각했던 것 같아. 네 말대로 나중에 늙어서 베짱이처럼 후회하기 싫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났는데... 몰라, 그냥 좀 이상해. 나는 지금까지 내가 개미처럼 산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거든?"

"그래서 주식도 개미처럼 했잖아."

재형이 장난스레 끼어들었다. 상희가 크게 한 번 진저리를 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맞아. 아직 아프다. 그 상처는 건들지 말아 줘. 아무튼 개미처럼 살면 어느 시점부터는 좋아져야 하잖아. 그게 동화의 교훈이잖아.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나중에 오히려 베짱이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재형이 상희를 슬쩍 곁눈질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나도 아까 네가 그럼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는데 아차 싶더라. 근데 너는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엄청 뜨거운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인간이 이렇게 차갑게 식었냐. 이제 보니까 너는 몸에 열기가 없어서 머리카락이 안 빠지나 보다."

"그러니까 말이야. 잊어버리려면 나처럼 깔끔하게 비워야지. 너는 애매하게 열정만 남겨두었다가 애꿎은 머리숱을 비웠잖아."

재형이 상희에게 주먹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상희도 허리를 뒤로 젖히며 겁내는 모양새를 취했다. 몇 차례 더 투덕거리다 상희가 재형에게 물었다.

"아까 네가 그런 말 했잖아. 지금껏 미루는 방법만 배운 것 같다고 말이야. 그러면 미루지 않는 건 어떤 거야?"

"글쎄, 일단 뭐든 해봐야겠지. 그냥 내일로 미뤄온 순간들을 오늘 살면 되지 않을까?"

재형이 난로 앞에 손을 비비며 답했다. 상희도 그를 따라 손을 비비며 맞장구를 쳤다.

"맞네. 그냥 해보면 되겠네. 근데 그렇게 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겠다. 아직은 미루는 게 익숙하긴 하니까."

재형은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궁금해져 상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그렇게 미루지 않고 사는 사람은 베짱이야? 아님 개미인가?"

"몰라. 배고프다. 그게 뭐 중요하겠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상희가 당장이라도 죽을 듯 눈을 위로 뒤집으며 배를 부여잡았다. 재형이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해봐. 개미로 살든 베짱이로 살든, 우리 둘 중 하나는 돈을 좀 벌어야 하지 않겠냐? 그래야 이렇게 추운 날에 누구 하나가 다른 사람한테 곱창전골을 사줄 것 아니야."

"이제 알았어? 그러니까 내가 너 퇴사하지 말라는 거야. 곱창전골 먹어야 되니까."

둘은 서로 마주 보며 낄낄댔다. 문득 재형이 뒤를 돌아보니 그새 대기줄 몇 팀 더 늘어나 있었다.

"와, 저 사람들은 한참 기다릴 것 같은데. 그나저나 우리는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되는 거야?"

재형의 막연한 질문에 상희는 본인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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