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전 나는 평생 라면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어젯밤 라면을 먹고 말았다. 충동적이었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어젯밤 열 시, 나는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어제는 유독 배가 고팠다. 점심을 늦게 먹은 탓에 저녁 식사 타이밍을 놓쳤고, 그냥 일찍 자고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뒤척여도 잠은 오지 않았고 간단히 요기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게 열두 시 되기 십 분 전이었다.
집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무심히 한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끌리는 것을 찾아 돌았다. 몇 바퀴를 더 돌고 나서, 라면 코너 앞에 멈춰 섰다. 그 순간에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입술이 마르고 손에는 땀이 났다.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라면 코너 너머로 편의점 창밖을 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영식을 만났었다. 식사 메뉴를 고르다 내가 라면을 다시 끊었다고 하니, 영식은 오른팔 주먹을 번쩍 들었다.
"너 그거 알지? 아무 생각 없이 손 들고 있으면 오래 지나도 힘든지 모르는데, '손 내리면 안 돼!' 하고 으으윽 힘을 주면 오히려 금방 지치는 거. 초등학교 때 벌 안 서 봤냐?"
영식이 치켜든 팔에 잔뜩 힘을 주자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끓여먹는 라면 하나를 집었다. 진라면 순한 맛이었다. 카운터로 걸어가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건넸다. 순간 현금으로 결제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졌지만 결제는 빠르게 처리되었다. 나는 그 라면 한 봉지를 손에 쥐고 황급히 편의점을 나섰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골목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집에 도착했을 때가, 모르겠다. 그때가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냄비에 물을 받았다. 물을 어느 정도 받아야 할지는 딱히 계산하지 않았다. 냄비의 물이 끓자 건더기와 수프를 먼저 넣었고 곧바로 면을 넣었다. 부스러기도 털어 넣었다. 진라면이었기에 계란은 넣지 않았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밥솥을 열어 밥이 얼마만큼 남았는지 확인했다. 식탁의 가스레인지 가까운 자리에 냄비 받침을 두고 그 오른편에 수저를 놓았다. 냉장고에서 꺼낸 김치는 냄비 받침 왼편에 두었다. 일련의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두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몇 분 동안 나는 초조하게 냄비 곁을 맴돌았다. 라면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러 번을 시도하고 실패했다. 거듭된 실패는 고통스러웠다. 무너지고 후회하고, 다시 결심하고, 또 무너지고 후회하고. 이렇게 무너지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지난번에 나는 우연히 라면 먹방을 보고도 웃으며 넘겼어. 지난주에는 팀원들과 감자탕을 먹으면서도 라면 사리에 손대지 않았지. 그래, 아직 기회는 있어. 잘 버텨왔으니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어. 라면을 먹을지 말지는 분명 나의 선택에 달렸어.
그런데 왜? 나는 스스로에게 따지듯 되물었다. 왜 라면을 먹으면 안 되는 거였지? 왜 나는 지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다들 먹는 라면을 평생 끊고 살겠다니, 어리석고 의미 없는 결심이야. 그냥 먹어. 그리고 다시 가끔씩 라면을 먹으면서 살면 되는 거야. 후회할 것 없어. 그냥 받아들여. 당연한 일상이 되고 나면, 고작 라면 하나 먹는다고 무력감에 빠지는 일도 없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나는 이 순간의 선택을 후회하겠지. 지금 머릿속에 거품처럼 차오르는 말들은 라면 먹은 냄비를 설거지할 때 밀려드는 무력감을 막지 못할 거야. 너는 곧 무력감에 빠질 거고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겁낼 필요 없어. 이제는 그 무력감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시간이 좀 지나고 살만해지면 다시 결심하겠지. 이번에는 꼭, 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합리화하느라 애쓸 것 없어. 라면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던 순간, 이미 무너지는 순간 또한 예정된 거야.
면은 잘 익은 것 같았고 안경에는 김이 서렸다. 냄비를 식탁으로 옮긴 뒤 뿌옇게 물든 안경을 벗었다. 오히려 시야는 더욱 또렷해졌다. 눈앞의 광경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감춰두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마치 댐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와르르 시신경으로 쏟아진 걸지도 모른다. 라면을 한 젓갈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넣었다. 그 맛은 놀랍지 않았다. 익숙한 맛이었다. 라면을 단숨에 빨아올리는 소리, 앞니부터 전해져 입안을 가득 채우는 열기, 그리고 그 열기를 달래려는 입과 목의 움직임까지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왜 그러고 사냐? 그냥 그때그때 먹고 싶은 걸 먹어."
영식은 치켜들었던 주먹을 내리며 말했었다.
"정 라면 먹는 게 꺼림칙하면, 매일매일 네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을 먹어. 라면이 너를 유혹하잖아? 그러면 라면보다 훨씬 더 끌리는 음식을 생각해 보는 거야. 끌리는 것을 찾으면 무조건 그걸 먹어. 그게 열라 비싸도 꼭 먹어. 음식점 찾아가기 더럽게 귀찮더라도 어떻게든 가서 먹어. 그렇게 매 끼니마다 네가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 거야. 그러다 보면 라면은 생각도 안 날 걸."
몇 젓갈만에 면은 사라졌다. 왼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잠시 남은 국물을 내려 보았다. 숟가락을 쥐고 일어나 밥솥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밥을 모두 국물에 말았다. 숟가락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흰 밥알들이 주홍빛 기름기에 물들었다. 냄비를 온전히 비우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라면 봉지 담긴 쓰레기봉투를 집 밖에 내놓은 뒤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 시계는 한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영식에게 만약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라면보다 끌리는 메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었다. 그러자 영식은 진저리를 쳤다.
"아오, 답답아. 라면을 안 먹으려 하지 말고, 그냥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고. 네 입맛이잖아. 네 입맛대로 살아. 왜, 아주 라면 먹기 전에 허락이라도 받지 그러냐?"
그랬다. 어젯밤 나는 라면을 먹었다. 다시 무력감이 밀려온다.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