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는 자동판매기?

통역도 협업이 필요합니다.

by 가을

가끔 어떤 통역이 제일 어렵냐는 질문을 받는다. 솔직히 어떤 통역이든 다 부담되고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도 준비를 할 수 있는 통역이라면, 나의 노력 여부에 따라 성과가 결정되므로 얼마든지 시간을 투자해 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해도 대비가 안 되는 순간이 있는데, 예를 들면 면담자가 갑자기 사자성어를 쓴다던가(나는 영어 통역사이다), 본인 고향의 특산물(곱창 같은 것) 등을 소개할 때나, 처음 듣는 기관이나 조직명을 줄줄이 나열할 때, 혹은 법조문 같은 어려운 내용을 속사포 랩처럼 읽어버릴 때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사자성어는 그 의미에 집중한다(의미를 모르면 면담자에게 염치 불고하고 물어보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유비무환이라는 사자성어를 면담자를 말한다면, "There is a saying 유비무환 in Chinses, meaning that preparation is essential"이라고 풀어 설명한다. 곱창 같은 특산물은 "local specialty, beef small intestines"라고 직역을 하고, 알 수 없는 기관/조직명은 한국말을 기반으로 급 창조를 하거나 "relevant organization"이라고 퉁쳐 버린다.


제일 난감한 건, 속사포 랩이다. 그것도 상당히 내용이 빡빡하고 전문용어로 가득 찬 법령이나 조문, 협약 같은 것을 엄청난 속도로 읽어버릴 때. 이럴 때는 등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흐르고 면담자에 대한 살기가 솟아오르며, 당장 볼펜을 집어던져버리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속사포로 최선을 다해 내용을 적고, 적은 내용을 기반으로 통역을 할 수밖에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내용을 많이 놓친다. 그러면 통역을 하고 나서도 그렇게 찝찝하고 개운치가 않다. 가끔은 상대편 면담자가 내 통역을 듣고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는데,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통역사라면 당연히 자동판매기처럼 한국어를 입력하면 영어가 쏙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러면 얼마나 좋으렸만, 우리도 인간인지라, 아무리 한국말이라도 면담자의 말을 이해할 시간은 필요하다. 생전 처음 듣는 전문용어나 법령 등을 읊조리면 통역은 막힐 수밖에 없다.


예전에 한 통역에서 면담자가 "경수로"라는 용어를 말한 후, 내게 조용히 "light water reactor"라고 슬쩍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면담자는 용어가 전문적이라 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리 알려준 것이었다. 솔직히 너무 고마웠다. 내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 통역사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 그 면담자에 대한 좋은 인상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회의의 품격은 통역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면담자와 통역사가 서로 협업하는 관계라는 인식이 조금은 필요할 듯하다. 아무리 실력 좋은 통역사라도 전문용어를 줄줄이 나열하거나, 법령을 줄줄이 읽어 내리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통역도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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