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번역의 성수기와 비수기

비수기의 여유 즐기기

by 가을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일하고 있지만, 항상 일이 많아 바쁜 건 아니다. 조수의 흐름처럼 어떤 때는 일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그 시기가 지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소위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는 것이다.


성수기일 때는 미친 듯이 일하면 된다. 가끔 점심을 거를 정도로 바쁘기도 하지만, 그래도 눈앞에 당장 할 일이 있으니 잡생각도 나지 않고 일에 집중한다. 문제는 비수기...


정말 하루 종일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영어 뉴스를 듣는 것도 기사를 읽는 것도 8시간 내내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처음 통번역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이 비수기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근무 시간 내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하는 척(?)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특히 코로나 시기에는 통역은 전무하고 번역만 띄염띄염 있어 심심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군가는 24시간을 48시간처럼 쓴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이리 한가할까? 이렇게 뒤처지는 것일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너무 바쁜 시간에 매몰되어 여유를 즐기는 법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업무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어쩌다 오는 비수기의 적막함에 불안해하는 것은 아닐까? 일없는 이 시간은 어쩌면, 다음 일을 준비하는 완충 지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데, 내가 그 가치를 너무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일이 없는 것은 내가 게으르거나, 일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그 시기에는 회사 전체에 통번역 업무가 없기 때문에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시간을 억지로 견딜 수도 있지만, 나름의 준비를 하며 즐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비수기를 즐길 수가 있을까?


"견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즐긴다"는 생각을 하니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나 연설문을 나만의 영문 버전으로 만들어 볼 수도 있고, 외국 영화 스크립트를 외워 볼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싫으면 가볍게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려볼 수도 있다. 요는 비수기를 왜 일이 안 들어오나 하는 불안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음 통번역을 위한 준비의 시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전히 통번역 비수기 기간 마음 한편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이 시기가 다음 성수기를 위해 하늘이 억지로라도 쥐어준 준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개구리가 더 멀리 뛰기 위해 움츠리듯, 일보 전진을 위해 이보 후퇴하라는 말처럼, 오늘도 더 멀리 뛰기 위해 나는 나름의 여유로운 준비 기간을 즐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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