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일주일 간 집을 비웠다
이번 한 주간 남편이 집에 오지 않는다. 교회에서 합숙을 한다고 했다. 둘이 함께 공유했던 집이 온전히 내 차지다. 그래서 신이 났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일주일, 나에게는 많은 계획이 있었다. 그동안 미뤄뒀던 집안일을 해치우는 것.
이불과 베개 커버, 카펫을 빨고 옷이 가득한 빨래통 비우기. 물건이 쌓여있는 거실 테이블 정리. 미뤄뒀던 가스레인지 기름때 닦기. 침실과 거실 바닥 꼼꼼히 청소하기. 날씨가 쌀쌀해지니까 가을 옷 꺼내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책상과 서재 정리하기. 수요일이 휴무인 동생을 불러서 함께 명절에 가져온 음식 먹기(남편 없이는 기간 내에 먹는 것이 역부족이다). 우리 집에서 놀고 있는, 동생에게 필요한 물건들 정리해서 주기. 사당역에서 버스를 타지만 집이 멀어 힘든 교회 청년 하룻밤 재워 편히 학교 가게 하기. 신청해둔 세미나 듣기. 독서모임 하기. 동네 주민 반찬 나눠주기. 소리 최대로 켜고 드라마 보기(사실 이건 평소에도 즐겨 하지만 가끔 피곤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한다). 좋아하는 배우가 운영하는 합정동 서점에 가서 책 읽기. 남편이 집을 비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이와 같은 '일주일 동안 할 것'에 대한 리스트였다.
그러나 나의 수많은 계획을 비웃듯 주일 저녁 감기 몸살이 찾아왔다. 연휴에 이어 무리한 탓인지, 밤낮을 알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내 계획이 방해를 받을 위기임에는 틀림없었다. 코가 막히고 열이 나고 두통도 계속 있는 데다가 하필이면 생리도 겹쳐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있었다. 도대체 감기약을 먹어야 하는 건지 진통제를 먹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나름의 방침으로 오전에는 감기약, 오후에는 진통제를 먹으며 이틀을 보냈다.
하지만 이따위 감기에 내 계획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틈틈이 계획한 바를 실행했다. 이불과 베개 커버, 카펫을 빨아서 햇볕에 바짝 말렸고 거실 테이블도 정리했다. 가스레인지 청소도, 반찬 나눔도 클리어했다. 동생이 와서 추석 때 고이 모셔온 쪽갈비도 꺼냈다. 베란다에서 필요한 물건도 꺼내어 들려 보냈다. 방마다 열심히 쓸고 닦았다.
그리고 삼일째인 오늘, 예정되어 있던 독서모임이 취소됐고 집에 오기로 했던 청년에게서 못 올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그럼 오늘은 뭘 해야 하지? 리스트에 뭐가 있었더라? 고민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평소에도 잘 안 하는 일들을 굳이 왜 남편이 없는 지금 열심히 하려고 안달이지?
말 그대로다. 사실 평소에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금주 컨디션이 좋은 것도 아니다. 체력이 넘쳐날 때도 하지 않던 이불 빨래를 굳이 콜록거리면서 지금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왜 굳이 남편이 집에 없는 한 주 동안 평소에 귀찮아하던 일들을 몰아서 하고 있는 것일까. 또 밥을 먹고 정리하고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하다가, 결국 그 답을 찾았다. 나는 남편의 부재를 '나의 할 일'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원래 움직임에는 할당량이 있어서 남은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몫으로 움직이여야 하는 것 마냥 빼곡하게, 일주일 간 '나의 할 일'을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주일은 별로 긴 시간이 아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북적북적 살 때는 가끔씩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일주일 동안 개인 시간이 생겼는데도 나는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남편의 자리를 무언가로 대체하느라 바빴다. 한 편으로 매일 있던 사람이 없는 것이 허전한 것도 맞고, 한 명이라도 없을 때 집안일을 해야 더 속도가 나는 것도 맞다. 그런데 막상 남편의 부재를 '할 일'로 매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어쩐지 '부재를 부재로 남겨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부재를 느끼는 일은 자주 있다. 가까운 사람이든 먼 사람이든, 누구든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 그 부재가 일주일처럼 짧은 기간일 수도 있고, 남은 시간의 전부일 수도 있다. 아직 서른 살도 채 안된 나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길다. 이것은 지금까지 경험해온 부재보다 앞으로 경험할 누군가의 부재가 훨씬 많다는 뜻이 된다.
그때마다 그 부재를 무언가로, 특히 나의 노력이나 힘으로 채우기 위해 애를 쓰다 보면 그 시간이 마치 아픈 와중에도 평소에 하지 않던 이불 빨래를 하는, 그런 모습으로 지나갈 것이다. 여유가 없고, 벅차고, 나의 마음과 몸의 상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내 마음과 몸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작성해 놓은 ‘할 일’ 리스트에 모든 신경을 쏟아붓는데, 만일 ‘더 긴 시간의 부재’를 만난다면 나는, 나의 생활은 온전할까?
그래서 남은 시간 동안은 짧지만 ‘부재를 부재로 남겨두는 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남편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비우는 것이고, 나의 생활은 나의 생활이다. 굳이 평소 나의 생활에 덧대어 무언가를 더 많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더 많이 만나야 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눈에 보이는 일들을 천천히 해나가면 된다. 부재는 부재로 남겨두고 나는 나의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나의 일상을 살면 ‘짧은 부재’에는 끝이 다가올 것이고 언젠가 만나게 될 ‘끝이 없는 부재’는 그 모습 그대로 새로운 일상이 되지 않을까.
하루를 마무리하며, 북클럽에 가입한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을 읽는데 이런 구절을 만났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들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것이다. 그건 정말 인간에게 내려진 최고의 축복이리라.
- 손보미, <맨해튼의 반딧불이> 중 ‘축복’
길고 짧은 부재,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부재와 함께 남겨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는 것이, 일상을 사는 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최고의 축복이구나. ‘부재를 부재로 남겨두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구나. 나에겐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축복을 지금부터 성실하게 연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