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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와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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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ley Feb 19. 2023

아기의 속도와 나의 속도, 그리고 약자의 속도

약자의 속도를 존중하는 일


임신을 한 이후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횡단보도의 신호가 정말 짧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임신을 한 이후 몸에 열이 많아졌다. 9월까지도 더워서 에어컨을 켠 채로 잠을 잤다. 만삭이 가까워 배가 나올수록 움직일 때마다 숨이 찼고 자연히 몸이 느려졌다.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짧은 초록불에 헐레벌떡 서둘러야 했다. 성격이 급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습관이었기에 둔해진 나의 몸이 낯설었다. 내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려고 긴장하며 열심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임신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배가 나오며 걸음이 느려지니 자연스레 함께 걷는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지라 임신을 한 상태에서 걷기가 힘든데도 자연스레 옆에서 걷는 사람들의 속도에 맞추고 있었다. 참 곤욕이었다. 내가 임산부임에도 다른 사람들의 걸음 속도에 맞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기의 아빠는 그러지 말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임신을 한 후에도 계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달은 것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임신한 나의 걸음 속도를 의식적으로 맞춰주는 사람과 느려진 나의 걸음 속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서 가버리는 사람. 원래는 비슷한 속도로 걸었던 내가 현저히 느린 걸음으로 걷자 곧장 그 이유를 깨닫고 걸음 속도를 맞추며 이야기를 나눠준 사람도 있었고, 다른 이들에게 넌지시 속도를 맞춰주자며 이야기를 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동시에 출발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걷다가 격차가 벌어진 일행도 있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간신히 만나서 숨이 차다고 넌지시 이야기했더니 “임신하고서 더 걸어야 한다”며 도리어 조언을 하는 탓에 기분이 상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보다 지금 내가 훨씬 더 많이 걷는다며 기분이 상해 쏘아붙였지만, 그가 임신 경험이 없는 여성이기에 이해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임신을 하기 전의 나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신을 하기 전 나는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임신을 한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 버스에서는 노란 의자에, 지하철에서는 약자석에 당당히 앉을 수 있었고 국가에서는 예방접종을 무료로 해주고 각종 바우처를 지급해 주었다. 임신을 한 이후 ‘약자의 속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임신하기 이전의 나와 임신을 한 나의 속도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했기 때문이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숨을 헐떡이며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너는 모습을 보던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운전을 하면서 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위험하게 인도가 아닌 차도에 서 계시는지 이해가 안 됐는데, 너를 보니까 알 것 같아.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짧아서 다리가 아프고 불편하신 분들은 그렇게 앞에서 건너기 시작해야만 초록불 안에 건널 수 있겠더라.”


그렇게 부지런히 횡단보도를 건너다니다가 불현듯 뉴스 기사에서 보았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시위가 생각났다. 시위를 두고 갑론을박이 참 많았다. 어떤 젊은 정치인은 이를 두고 시민들의 출근길을 볼모로 잡았다며 비문명적이라고 발언했다. 전장연의 대표는 혐오를 감수하면서까지도 장애인의 이동권은 사회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임을 말하고자 했다고 시위의 취지를 설명했다. 나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젊은 정치인의 발언에 나는 화를 내며 혀를 끌끌 찼다. 매일 아침 당연하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껴야 했지만, 그 당연한 일을 누군가는 당연하게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함이 아닌가. 큰 마음을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그들의 속도를 우리가, 이 사회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속도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임신을 해 잠시 사회적 약자가 된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의 무게는 현저하게 다를 것이기에 내가 감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배가 부른 만삭의 임산부인 나도 약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눈치 보며 움직여왔을 것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사회적 약자가 될 일이 없었다면 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웠다.



출산을 한 이후 나는 더 이상 임산부가 아니다. 고로 공식적인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임산부 시기의 병원 진료비나 처방전 비용과 지금의 것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집에는 새로운 사회적 약자가 생겼다. 바로 아기이다. 임산부 시절에는 내가 국가의 혜택을 받아 무료로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다면, 지금은 아기가 개월마다 정해진 국가 무료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 출산 전에는 나로 인해 여러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면, 이제는 아기로 인해 여러 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다. 임신을 했을 때는 내가 우리 가정 안에 최대 약자였다면, 이제는 그 자리가 아기에게 넘어갔다.


출산 이후 신생아를 돌보며 너무 힘들었다. 잠을 자지 못한 채 계속 아기를 돌보니 신경이 곤두섰고 짜증이 솟구쳤다.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나가 있는데, 아기는 자꾸만 울어대는 통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주저 않아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수면 시간이 곧 하루의 질을 좌우하는 나로서는 두 시간마다 깨어나 밥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아기가 너무 힘들었다. 제발 잠 좀 자고 싶다며 아기를 원망하기도 했다. 모유는 소화가 빨리되니 밤에 분유를 먹이면 아기가 더 오래 잔다는 말을 듣고는 밤에는 꼭 분유를 먹였다. 제발 얼른 아기의 수유텀이 길어지기를, 얼른 아기의 잠 시간이 길어지기를 바랐다.


아기의 수유, 잠, 기저귀 시간을 메모하며 육아에 도움을 받고 있는 어플에 공개육아일기 카테고리가 있다. 이 카테고리는 아기가 30일이 되는 날에 들어가면 30일 된 아기의 양육자들이 작성한 육아일기를 보여주고, 아기가 50일이 되는 날에 들어가면 50일 된 아기의 양육자가 작성한 육아일기, 70일에 들어가면 70일 된 아기의 양육자가 작성한 육아일기를 보여준다. 일기들을 읽으며 눈에 띈 것은 역시 잠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 벌써 8시간 통잠을 잔다고? 아니 벌써 12시간을 잔다고? 2개월 아기가? 말이 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일기를 읽고 나면 한숨이 나왔다. 잠 좀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다 문득, ‘약자의 속도’를 떠올렸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기는 우리 집의 약자이고 돌봄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내가 약자인 아기가 나의 속도를 어서 맞추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갓 신생아를 벗어난 아기의 위는 작고, 작은 위를 가진 아기는 당연히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고, 조금씩 자주 먹으니 자는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나는 아기가 어서 성인처럼 푹 자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기는 아기의 속도대로 먹고 자고 싸며 자라고 있는데, 나는 아기가 나의 속도에 맞지 않는다고 한숨을 푹푹 쉬고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걸음이 느린 임산부에게 더 걸으라고 조언하는 사람에게 욱했던 내가, 전장연 지하철 시위에 대한 젊은 정치인의 발언에 화를 냈던 내가, 이 사회가 약자의 속도를 맞추기는커녕 관심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가장 작은 사회의 단위인 우리 가정 안의 약자에게는 나의 속도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는 약자의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고, 그들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이 사회와 구성원들이 나쁘다고 속으로 비난하던 나는 그제야 그들의 속도를 존중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며 화낼 자격이 없음이 검증된 것이다. 구성원이 고작 세 명뿐인, 우리 가정의 작은 사회 안에서도 두 어른이 약자인 아기의 속도를 이해하고 인정하기 어려운 판에 구성원이 셀 수 없이 많은 사회에서 약자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속도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들의 속도대로 당연하게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약자의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속도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기 위한 다수의 사람들의 노력 말이다. 그러니 ‘약자의 속도’에 관한 문제는 내가 쉽게 왈가왈부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기의 속도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기다리지 못한 채 그가 나의 속도에 맞춰 성장하기를 바란 나의 마음을 깨닫자, 아기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아기는 자신의 개월 수에 맞게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 보편적인 범위 내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성장하고 있다. 2개월 차에 8시간이나 12시간을 자는 아기는 그 아기의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고, 우리 집 아기는 우리 집 아기의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다. 나는 그 속도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로 인해 나의 삶이 불편해지고 일상의 흐름이 깨지더라도 여전히 그의 속도를 존중해야 한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체이기에 아마 평생 동안 서로의 속도가 다를 것이다. 이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고유한 속도를 유지하며 그것을 존중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나와 우리 집 아기는 서로 삶의 속도를 존중하며 더불어 사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밤 중에 일어나 아기의 배를 채워주는 일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나의 작은 단위의 사회에서도, 큰 단위의 사회에서도 누군가에게 나의 속도를 강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타인의, 특별히 약자의 고유한 속도를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작은 단위의 사회에서도, 큰 단위의 사회에서도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구성원들이 서로의 고유한 속도를 존중하며 살아가다 보면 마침내 더불어 사는 기쁨을 다 같이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적인 희망을 품으며 오늘도 사회의 가장 작은 개인인 나 한 사람이 더욱 노력해 보자고 다짐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 <버드스트라이크>(구병모, 창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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