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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Aug 28. 2021

나는 전세살이가 좋았다

나는 진짜 살고 싶은 동네와 주거환경 등에 맞는 집을 찾고 싶었고, 그걸 찾느라 이 동네 저 동네 전세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세를 살아서 좋기도 했다. 동네나 집이 지겨워지면 이사를 결심하고 동네를 보러 다녔다. 꼭 강남이거나 아파트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좀 더 다양한 곳에서 살다 보면 '아, 나는 알고 보니 아파트에 적합한 사람이었구나' 혹은 집은 좁아도 직주근접이 중요한 사람인지, 큰 평수를 원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싶었다.


서울에 올라와 언니 집에 얹혀살다, 월세살이를 하다가, 전세자금을 모아 전세살이를 할 수 있게 됐을 때 '아, 나 좀 대견하다' 싶었고 얼마간 뭉클했다. 지금은 원룸 한 칸 얻기도 힘든 돈이지만 2013년 당시에는 무려 대출도 없이 마련한 전세자금으로 전셋집을 마련했었으니까. 이만하면 부산에서 서울에 상경한 애 치고 잘하고 있다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방배동-사당-마포로 이어지는 내 서울에서의 여정도 나쁘지 않았다. 2년 만에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주인을 만난 것도 아니고 살갑게 지내진 못해도 티 나게 나쁜 옆집, 앞집, 윗집, 아랫집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다. 근데 딱 거기까지였다.


전세금을 올리겠다는 나쁜 집주인을 만나지 못한(!) 때문에 나는 마포 전셋집에서 무려 6년이나 눌러앉아 살았다. 집주인이 2년 만에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다면 진즉에 다른 수를 써서 좀 더 일찍 부동산을 알아보고 다녔을까 싶어서 괜한 집주인 탓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출퇴근 30분 내외의 직주근접이 가능했고, 부산에서 살 적부터 마포는 나의 워너비 주거지였고, 맛집과 멋집이 많았고(사는 동안 계속 더 생겨났고), 마포에서는 서울 어디든 부담 없이 오갈 수 있었고, 사는 동안 마포는 더 좋아졌고 나도 마포가 더 좋아졌다. 그렇게 마포 타령을 하면서도 마포에 집을 살 생각은 못했다. 아직 나는 용산에도 못 살아보고, 은평에도 못 살아보고 서촌에도 못 살아봤는데 덜컥 마포에 집을 사는 건 너무 이른 판단이라는 생각에서였다.


6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사는 집의 전세금 빼고 주변의 집들은 다 천정부지로 올랐다. 매매, 전세할 것 없이 얼씨구나하고 모조리 싹 다 올랐다. 심지어 이제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이 전세라는 제도가, 심지어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어 한글을 소리 나게 'Jeonse'라고 쓴 뒤 전세의 의미를 덧붙인다는 이 제도가 언젠가는 사라지고 월세시대가 올 거라고 한다. 체감하기로는 이미 그 시대가 빠르게 오고 있다.


전세 제도가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게 된 계기가 과거 고금리 시대 전세금을 받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를 받아서 쓸 수 있던 환경 때문이었고, 저금리 시대에 전세금을 받아서 은행 이자를 받느니 월세를 받는 게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저금리라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월세시대가 앞당겨진 건 오히려 전세러들을 보호하겠다면서 시행된 임대차 3법의 영향이 크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을 망각하고 시장의 논리를 무시하고 무턱대고 정책, 정책, 또 정책을 끊임없이 쏟아낸 결과다.


전 세계적으로 돈이 무진장 풀리면서 갈 곳 없는 시중의 돈들이 부동산이나 주식 등의 자산에 쏠린 탓도 있다. 시중에 통화공급을 늘리는 양적완화 시대에 당연한 전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것. 이제 금리가 조금씩 오를 기미가 보이고 풀어 둔 돈을 거둬들이기 시작하는 이른바 테이퍼링이 시작되더라도 이미 오를 데로 오르고 월세 대세로 변해버린 시장에서 내가 갈 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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