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고, 내 꼬락서니는 너무나 초라하고, 그래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집에 들어가자니 억울한 날. 꼭 대단히 우울하진 않지만 뭔가 일상이 너무 단조롭게 느껴지는 날. 애써 치장하고 나와서 친구의 결혼식에 들렀다 배는 부르지만 뭔가 허전한 밥을 먹고 나왔더니 이제 겨우 2시지만 약속은 없고 그냥 집에 들어가긴 아쉬운 날. 또 한 번의 실패로 기억될 소개팅을 끝내고 잘 신지 않던 구두를 신어서 발은 아픈데 그냥 집에 들어가자니 심란한 날. 주말인데 늦잠에 실패하고 오전 7시부터 괜히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다 나만 빼고 다 즐겁게 지내는 것 같아 슬퍼지고 마음만 괜히 바빠지는 어느 토요일 아침.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최애 추리닝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쓰레빠(슬리퍼라고 하면 왠지 느낌이 안살아서)를 질질 끌며 나왔는데 특별한 목적지는 없을 때.
이럴 때 가장 손쉽게 닿을 수 있는 공간이 영화관이다. 영화관 앱을 켜서 가장 가까운 영화관을 눌러 지금으로부터 가장 빠른 시간에 하는 영화가 뭐가 있는지 찾아 본다. 최소한의 취향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대체로 오케이다. 나의 경우 공포영화만 아니라면 좋겠다. 일본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잔잔한 멜로영화라면 더할 나위 없다. 어쩌면 그런 날 나의 인생영화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저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렇다 보니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고, 어둡고 적막한 공간 안에서 움크리고 있다가 환하게 밝혀지는 스크린에 온전히 집중하다 보면 영화를 보러 오기 전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근심도 ,걱정도, 우울도, 허전함도, 아쉬움도 잠깐이나마 잊힌다.
이런 날 일본영화 ‘퍼펙트 데이즈’라는 작품을 만난다면 요즘말로 럭키비키다. 배경은 도쿄 시부야, 공공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간다. 남자 주인공(히라야마)은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 옛날 유명했던 영화 ‘쉘 위 댄스’의 ‘야쿠쇼 코지. 아저씨와 할아버지 사이에 어떤 말이 있다면 좋겠다. 이런 멋진 남자 어른이라니! 화장실 청소를 할 때 입고 나오는 작업복마저도 멋있어 보인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원래 부자였는데 어떤 일을 겪고 나서 속세를 떠나서 홀로 지내는 것 같은데, 끝내 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작업복을 입고 집을 나선 뒤 집 앞 자동판매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뽑아 차를 타고 카스트 테이프로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한다. 공공화장실을 뭐 그렇게까지 청소하냐 싶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청소를 한다. 함께 일을 하는 동료는 적당히 농땡이도 부리고 성실한 그를 살짝 이용해 먹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일터 근처의 낮은 공원에 올라 샌드위치를 먹고 필름 카메라로 하늘 사진을 찍는다. 일을 마치면 목욕탕에 들러 씻은 뒤 늘 들르는 식당에 가서 늘 먹던 음식과 함께 술을 한 잔 곁들인 뒤 집에 와서 책을 보다 잠을 청한다. 가끔 휴일이면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현상하고 단골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신다.
이런 쌀로 밥 짓는 듯한 무미건조한 영화에서 무얼 얻을 수 있겠냐 싶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는 꾸준함과 균형감이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고 나면 진실되게 하루하루를 꾸준히 잘 살아내고 싶어 진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압권인데 차 안으로는 음악 ‘Felling Good’이 울려 퍼지고 운전하는 히라야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영화 내내 인생을 통달한 자의 평온한 표정을 짓던 그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스크린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영화관의 존재 이유가 느껴졌다. 이건 정말 영화관에서 큰 스크린으로 봐야만 한다. 내가 영화관에서 일을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