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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Sep 09. 2024

퇴근이 너무 좋아서 출근을 끊을 수가 없다

영화 '패터슨'

직딩 1n년차. 


1년만, 3년만, 5년만 하며 버티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 이젠 선배보다 후배가 더 겁나고, 그사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법들이 많이 변했다. 라떼는 문자보단 전화가, 전화보단 직접 찾아뵙는 게 예의라고 배웠는데 최근엔 괜히 찾아뵙겠다 했다가 중요한 일 아니면 전화는 커녕 메일이나 문자로 달라고 해서 '내가 오바했구나' 했다. 


회사가 싫어서 야심 차게 퇴사도 해봤고, 이직도 해봤고, 창업도 해봤다.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한 데다 뭔가 새로운 게 있을까 싶어 대학원도 다녀봤고, 자기 계발을 하겠다며 외국어며 자격증이며 각종 학원도 기웃거렸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승진도 해봤고 물도 먹어 봤고 거지 같은 상사도 만나 봤고 꿍짝 잘 맞는 동료를 만나 신나게 일도 해봤고 폭탄주 돌려가며 으쌰으쌰 회식도 해봤고 엄청난 숙취에 시달리는 와중에 겨우 출근해 하루가 1년 같은 경험도 해봤고 상사한테 들이대 보기도 했고 자꾸만 높아져가는 연차에 선배보다 무서운 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이란 것도 느껴봤다.


잠깐이나마 프리랜서 신분으로 글을 써보기도 했고, 주식회사를 설립한 창업자로 지내본 경험을 해본 결과 나는 직장인 체질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기를 좋아하고 생각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선호한다. 직장인 체질이란 게 완전한 사무직 체질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인 출퇴근 시간이 있고, 급여가 나오고, 함께하는 동료가 있는 그런 직장인을 말한다.


지긋지긋하고 거지 같고 짜증 나고 신물 나게 싫으면서도 직장이란 곳은 생각보다 재밌는 하나의 작은 사회고, 생각보다 안정감을 주는 구석이 많다. 오래된 친구가 편하지만 매일매일 만나는 직장 동료와 더 할 말이 많고, 나의 24시간 중 최소 8시간, 그러니까 3분의 1을 차지하는 소중한 곳이다.

영화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 주의 소도시 ‘패터슨’에 사는 동명의 버스기사가 주인공이다. 영화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패터슨의 매일같이 비슷한 일상을 쫓는다. 늘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한 뒤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일한 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애완견 산책 겸 동네의 단골 바에 들러 맥주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겨우 두세 줄의 문장으로 요약되는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살아 낸다. 어쩌면 너무나 단조롭고 시사한 날들의 연속이다. 그는 일과 중 틈틈이 자신의 일상과 단상을 '시'로 풀어낸다. 무미건조하고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하루하루지만 사실은 조금씩 변주되고 있다. 그 사소한 변주를 알아채며 나만의 깨알 같은 행복을 찾아나가는 게 K직장인인 내게 주어진 하루를 잘 살아내는 비법이다.

실패한 직장인과 성공한 직장인의 차이는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가가 아니라 회사로 출근하는 마음가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비밀인데 나는 사실 회사에 출근하는 일이 사실 그렇게 괴롭지 않다. 어떨 땐 설레기도 한다. 얼른 출근해서 커피 마셔야지, 동료들에게 출근길 내 삽질과 주말에 본 드라마 이야기와 어제 만난 특이한 사람 얘기 브리핑해야지, 점심시간에 뭘 먹을지 점심메뉴를 고민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내야지, 퇴근 이후엔 회사 근처 삼겹살 집에서 소맥을 쉐킷쉐킷 말아 3잔 연속 털어 먹어야지와 같은 생각이 출근하는 내 마음을 꽤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퇴근이 너무 좋다. 진짜 진짜 좋다. 퇴근 없는 삶은 너무 싫을 것 같다. 퇴근해도 집에 가서 또 일을 해야 한다고? 그래도 물리적인 퇴근만으로도 좋다. 퇴근이 너무 좋아서 출근을 끊을 수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이 마음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내 주변의 상황이 소용돌이치지 않고 나를 잘 받아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꽤 성실하고 괜찮은 K직장인 1n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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