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영화관에서 잘 잔다.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잤다는 의미라기 보단 대체로 조는 편이다. 물론 ‘꿀잠’ 수준으로 푹 잘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잠깐 졸다 깨서 안 잔 척한다. 영화관에서 졸다가 영화 장면을 중간에 잠시 놓칠지언정 영화의 끝은 보고 나온다. 큰 토막으로 스토리를 놓쳤을 경우도 있는데, 중간에 놓친 장면이 영 신경 쓰일 때면 이른바 N차 관람을 하기도 한다.
영화관에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일과 중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개봉하는 영화를 전부 다 볼 수는 없겠지만 맡은 업무에 따라서 주요 개봉작을 챙겨보는 것도 주요한 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언론이나 영화업계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평일 낮 시사회를 챙겨서 보는 편이다. 주변인들의 반응도 살필 수 있고 개봉 전 영화의 흥행 여부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맹점은 언론배급시사회가 평일 낮 2시에 주로 열린다는 점이다. 오후 2시는 내가 졸음에 가장 취약한 시간이다. 그냥 밝은 빛의 사무공간에 있어도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인데 어두운 극장 안에서 졸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영화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그저 개인의 생리적인 현상이다. 낮잠을 추구하는 그저 그런 K-직장인의 하나의 루틴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오후 2~5시 사이에 하는 영화를 볼 때는 거의 80% 이상 잔다고 볼 수 있다.
영화마다 별점이 있다면 내겐 나만의 수면지수가 있다. 평가기준은 얼마나 꿀잠 자는데 일조했는가, 자다 깨서 봐도 충분히 재미있는가, 단 한순간도 졸지 않고 집중했는가 등 그때그때 다르다. 그래서 나의 ‘졸음지수’가 일종의 흥행의 바로미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평일 낮 시사에서 내가 졸지 않은 영화는 진짜 재밌는 영화라는 방증이니까 말이다.
혹시나 수면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매우 지루하고 긴 영화를 예매해서 영화관으로 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일 지도 모르겠다. 집을 떠나 외부의 숙박업소가 아닌 이상 영화관만큼 잠을 청하기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하는 곳은 드물지 않냔 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캄캄한 어둠에 휩싸이면서 서서히 시동을 건다. 영화 제목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되면 어딘가 모를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토록 아늑한 공간이라니!
영화 외의 빛은 모두 꺼지면 영화관 바깥의 일도 모두 차단되는 기분이 든다. 물론 옆 자리에 앉은 이의 부스럭거림 팝콘과 콜라 먹는 소리 등이 거슬릴 수도 있지만 적당한 백색소음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마저도 거슬린다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시간대를 부러 찾아 예매하는 방법도 있다. 영화관 입장에서는 매우 애석한 대목이지만 매우 이른 시간이거나 어중간한 시간대에 예매하면 거의 영화관을 독점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관에서는 오히려 좀 더 잘 자라고(?) 판을 깔아주기도 한다. 상영관에 매트리스를 들여놓고 침대관을 만들기도 하고 요즘은 리클라이너 같은 편한 의자를 놓은 관을 만들어 영화를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는 환경을 제시하는 식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영화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숙면을 취한 영화가 있다. 2024년 3월 개봉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작품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는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 어느 마을에 도쿄 연예기획사가 글램핑장을 지으려고 한다. 이를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과 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기획사 직원들 간의 미묘한 긴장감이 오가고 충돌이 이뤄지는 사이 충격적인 결말이 도사리고 있는데!(와, 흥미진진하다!) 인간 대 인간의 충돌, 그 이상의 인간 대 자연의 충돌을 묵직하게 풀어내는 이 영화는 각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역시 마음에 오래 여운이 남는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듯 매우 짧지만, 깨끗하고 맑은 자연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많은데 영화의 호흡이 무척이나 느리다. 영화를 본 뒤 관람평을 훑어보다가 ‘나무도 연기를 하네’, ‘영화 보러 왔는데 자연 구경만 실컷 했네’ 등의 한줄평이 무척 웃기면서도 내 마음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살포시 ‘하트’로 내 마음을 보탰다. 역시 우리나라 관람객들의 촌철살인이란!
나 역시 한 참을 졸다 깨서 마지막 장면을 목도하고 있자니 나는 이게 대체 뭔 영화인가 싶었다. 영화와 감독에 대한 명성을 익히 들어왔기에 아마도 무척 훌륭한 영화일 텐데 딥슬립을 하고 나온 쪽팔림을 차치하고 이건 잠깐 존 수준이 아니라 숙면을 취했기에 영화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면 뭐라 말을 얹기도 민망한 수준. 이건 영화를 본 것도 안 본 것도 아닌 아리송한 상황. 안타깝게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회 차 관람을 하면서 나는 또 졸고 말았다. 그래도 2번 관람하는 사이에 영화의 궤가 맞춰지면서 영화에 대한 평을 어느 정도 얹을 수는 있겠다. 언젠가 3회 차도 도전해 봐야지.
그래서, 영화관에서 진짜 잠이 잘 오는 게 맞냐고? 물론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