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말도 안 통하고 시끄럽고 맘에 안 들면 울어 제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봐야 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은 에너지를 소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조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크다. 나 좀 봐달라고, 내 손 좀 잡자고, 내가 안아주겠다고, 뽀뽀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적응이 안 돼서 나조차 놀랄 지경이다. 내게 주어진 다양한 사회적 역할 중에 이모라는 역할만큼 성실하게 무한 긍정으로 행할 수 있었던 게 있었나 싶다. 내가 이모라는 사실을 인지해주고, “이모”라고 불러주고, 내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고, (가끔이지만) 달려와 안기고, 이모라는 존재를 알아준다는 사실에 감격해 눈물이 핑 돌뻔했으니(실제로 약간 찔끔) 말 다했다. ‘그게 피가 당기는 거’ 라거나, ‘니 새끼 낳으면 더 할 거다’라는 해석이 마뜩지 않지만 여하튼 조카라는 존재는 요물이다.
조카 덕분에 ‘사랑의 하츄핑’이라는 영화를 봤다. 눈이 큰 핑크색 인형 이름이 하츄핑이고 여러 가지 핑(?)들이 나온다는 정보만 알고 시작했는데 웬걸, 일종의 감동과 교훈도 있다. 웬 왕국의 공주인 로미 공주와 하츄핑과의 우정 서사가 기본 뼈대인 가운데, 이들의 관계를 둘러싼 함정과 저주를 풀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한 뒤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이야기다. 안정이라는 굴레에 안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험에 맞서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하츄핑의 이야기가 뻔하지만서도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스토리상의 개연성과는 별개로 다양한 핑들의 존재에 놀람을 금할 수 없었다. 초반에 로미 공주가 하츄핑을 만나기 전 ‘핑’과 조우하는 장면이 있다. 꽁꽁핑과 딱풀핑이란다. 꽁꽁핑은 이름 그대로 냉랭한 친구다. 모든 걸 꽁꽁 얼려버린다. 딱풀핑은 처음에 내가 잘못들은 줄 알았다. 다시 눈을 닦고 봐도 진짜 딱풀핑이었다. ‘세상에, 저건 딱풀의 PPL인가!’ 했는데 유대감과 접착을 상징하는 티니핑이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서로 싸우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대상을 붙게 만드는 능력이 있단다.
아, 티니핑을 기획한 사람은 천재인가. 이런 식이라면 티니핑은 무한 증식이 가능하고 앞으로도 더더더 많은 티니핑 시리즈가 나올 수 있는 게 아닌가. 티니핑 때문에 파산핑이 될 뻔했다는 말이 농이 아니었다.
함정과 저주로 인한 역경의 과정에서 로미 공주와 하츄핑이 잠시 이별을 맞이하는 하이라이트 순간에 상영관 내에서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슬픔에 북받친 한 아이의 대성통곡이 시작되었다. 대성통국 울음소리 덕분에 어른들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상영관에 있는 사람들의 뒤통수에서도 많은 이들의 미소가 눈에 선하게 보였다. 울음소리가 귀여울 수도 있구나. 극장에서 함께 보는 기쁨이다.
혹시 내 옆에 앉은 조카 2호도 울고 있는 건 아닌지 눈치를 봤는데 다행히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매우 몰입해 있었다. 매번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팝콘을 먹은 뒤부터 ‘이모 영화 언제 끝나?’라며 질문을 수십 번 해대던 날과 달랐다. 과연 사랑의 하츄핑의 위력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엔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해 구해주는 서사가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예전에 비하면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공주님이 등장한다는 점이 달라진 점 중 하나다.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길 기다리기보다는 고난과 역경을 스스로 헤쳐나간 뒤 오히려 왕자님을 구해내는 우리의 로미 공주!
거리에 넘쳐 나는 다양한 로미 공주들이 짝꿍 친구를 만나 즐거운 추억을 쌓고 부딪히고 깨지기도 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잘 헤쳐나가는 씩씩한 여성으로 잘 성장해 나가길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