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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Oct 07. 2024

인생엔 빨리 감기 버튼이 없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언제부터였을까. 영화를 보기 전, 영화관에 가기 전에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은 영화 유튜브와 각종 SNS 채널이 되었다. 이미 감상을 마친 사람들의 평가나 이른바 영화 인플루언서들의 리뷰 혹은 해설 영상을 보며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한다. 간단하게 요약되어 이해하기 좋게 떠먹여 주는 리뷰 영상을 보며 우리는 느끼는 법을, 감상하는 법은 잊는다. 이미 볼거리가 너무 많은 시대에 영화 한 편을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일 시간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 우리에겐 이미 봐야 할 숙제들이 너무 넘쳐나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흑백요리사'도 봐야 하고 각종 숏츠도 봐야 한다. 상대적으로 긴 러닝타임의 드라마나 영화를 오롯이 시간을 들여 보기엔 시간도, 집중력도 부족하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감상'하기보단 빠르게 '소비'하고 있다. 소비되기 위해 생산되는 다양한 콘텐츠를 최대한 많이 섭렵하기 위해 빠른 재생은 당연한 옵션이다. 짜릿하고 즐겁지만 어딘가 허전하고 약간의 찝찝함과 위기를 느끼면서도 이미 통제가 불가한 영역으로 넘어갔다. 너무나 뜨겁고 맵고 짠 음식을 매일같이 먹다 보니 약간의 심심한 맛도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영화를 보고 싶은 욕망과 넘쳐나는 콘텐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영화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영상을 보다 좋은 명대사 같은 걸 캡처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퉁친다. 그렇게 영화 한 편을 영화관에서 몰입해서 한 번에 볼 때만 허락되는 황홀하고 짜릿한 경험을 계속해서 미루고 산발적이고 단조롭게 최소한의 정보만을 취득하기에 이른다. 매일같이 새로운 숏츠와 유튜브 영상이 업로드되고 금세 또 다른 영화가 개봉할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내 취향을 알려면 많은 영화를 보는 방법 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누군가 추천해 준 영화를 보고 내 인생 영화를 만나는 마법이 벌어지면 좋겠지만 내 영화 취향이란 게 족집게 과외처럼 몇 편의 영화를 본다고 해서 바로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건 아마 가짜 취향일 가능성이 크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다.


싫은 것을 봐야 좋은 것을 알아보는 법이다. 그저 그런 음식을 무수히 먹어봤기에 맛있는 음식을 알아보는 것처럼,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면 이 사람이랑은 오래갈 것 같은데 싶은 그런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양보다 질이라고 하지만, 양이 담보돼야 질도 얻을 수 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자기를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고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 ‘재회’와 그의 게이남사친 ‘흥수’가 등장한다. 재희는 술과 클럽, 연애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20대 청춘의 최대치를 즐기며 살아가는 캐릭터다. 흥수는 성소수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어 세상과 거리 두며 살아가는데 재희를 만나며 조금씩 세상으로 나아간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냐"며 흥수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일깨워준다.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며 겉으로는 이른바 센캐인 재희는 모든 일에 거침이 없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재희는 금사빠 기질이 다분하지만 눈치 보고 계산하지 않는다. 직진으로 돌파하며 부딪히고 울고 터지면서 단단해져 간다. 우리에겐 어쩌면 이런 재희적 사고와 행동력이 필요하다.


실패하기 싫고, 상처받기 싫어서, 오답은 피하고 정답만 추구하고 싶어 너무 재고 따지느라 가끔 중요한 걸 놓치고 산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떠먹여 준 정답지는 일종의 힌트는 되어줄 수는 있지만 해답이 되어줄 수는 없다. 인생엔 정답이 없으니까.  


삶은 대체로 무수한 ‘별로’인 순간으로 채워져 있지만 그 수많은 별로인 순간 덕분에 빛나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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