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습득한 후천적 소문자 j의 삶을 사는 내게 촘촘한 일정보다는 어느 정도의 빈칸이 익숙하다. 일상도 인생도 마찬가지. 여행스케줄도 비행기 티켓과 숙소 정도만 예약해 두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이런저런 걸 찾아보는 편이다(그래도 부모님과의 여행은 패키지가 정답이다). 계획해 봤자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든 인생이든 어떻게든 흘러간다는 걸 알기도 해서.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의 남자주인공 개츠비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뉴욕 출신의 대학생이다. 뉴욕 근교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지만 학교 생활엔 영 관심이 없고 그저 가끔씩 즐기는 포커 게임과 학교에서 만난 지역 미인대회 출신의 여자친구 애슐리만이 그의 관심사의 전부다. 유명한 은행장의 딸이기도 한 데다 이쁘고 취향도 잘 맞는 것 같다. 학교 내 신문사에서 영화 관련 기자로 활동하는 그녀가 우연한 기회에 뉴욕에서 평소 좋아하던 영화감독을 인터뷰할 기회를 얻게 되고 그녀와 함께 뉴욕에 가서 즐길 생각에 들떠 있다.
뉴욕이 낯선 그녀에게 뉴욕을 소개해 줄 생각에 1박 2일 꽉 차게 일정을 채웠고 인터뷰만 무사히 마치고 나면 ‘써니 데이 인 뉴욕’이 펼쳐질 줄 알았지만 조금씩 균열이 나기 시작하고, 꽉 짜여진 일정은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1시간이면 끝날 거라던 애슐리는 오지를 않고, 불안한 마음의 개츠비는 터덜터덜 익숙했던 뉴욕을 거닐다 별로 반갑지 않은 학창 시절 친구를 우연히 만나고, 예전 여자 친구의 여동생과 뜻밖에 조우하기도 하고, 뉴욕에 사는 형네 집에 들렀다 결혼을 앞둔 형에게 여자친구의 특이한 웃음소리 때문에 도무지 결혼하지 못하겠다는 폭탄선언을 듣기도 하고, 형을 대신해 포커 게임에 갔단 큰돈을 따기도 한다. 하염없이 거닐다 비가 쏟아지자 우연히 급히 올라 탄 택시에서 예전 여자 친구의 여동생을 다시금 만났다가, 그녀와 함께 미술관에 들렀다가 원치 않게 숙모와 삼촌을 만나 가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이 주최한 파티에도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애슐리를 부모님에게 소개해야 하는데 인터뷰를 간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우연히 들른 어느 바에서 만난 직업여성과 그 파티를 찾게 된다.
그 자리를 잘 모면했다고 생각했는데 개츠비의 엄마는 그를 불러다가 ‘애슐리는 어딜 가고 어디서 저런(!) 여자와 같이 왔느냐’며 그를 나무란다. 그가 직업여성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며 말이다. 우아하고 고상한 취향의 여왕인 줄 알았던 엄마에게 알고 보니 뜻밖의 과거가 있었다. 그녀 역시 거리의 여자였으며, 우연히 만난 그의 아빠와 그 와중에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게 됐다는 것.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아니 자식이니까 더 그렇게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싶은데 엄마의 충격고백 이후 개츠비는 오히려 엄마가 이해되기 시작하고 가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을 다시금 돌아보고자 하는 용기가 생긴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법이 없는 구름낀 날, 뜻밖의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인생과 사랑은 계획대로 되지 않고, 예상 밖의 우연과 인연으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