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 소식이 없던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문자가 왔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자신이 처한 지금의 현실, 요즘의 고민 등을 토로했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때문에 시간을 많이 뺏기는 처지에 회사에서는 관리자의 위치에 올랐지만 자신은 누군가를 케어해 줄만한 마음의 여유와 물리적인 시간이 없다고 했다. 직장은 그저 아이를 키우기 위한 돈을 주는 곳일뿐 일을 잘해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며, 그나마 복지와 급여가 나쁘지 않은(나쁘지 않다고 했지만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매우 좋은 연봉과 복지혜택을 주는 곳) 그 직장을 최대한 누리며 살겠노라 했다. 집에서 남편은 이제는 그야 말로 육아 동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아이의 아빠로서의 자질만 유지한다면 밖에서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더라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아이에게 쓴다는 매달의 학원비 규모를 들으며 입이 떡 벌어졌는데 그 동네 다른 부모들은 훨씬 더 많은 돈을 쓰고 있으며 더 좋은 교육을 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아쉽다고 했다.
친구는 내게 아마도 어떤 종류의 공감 혹은 위로를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네 월급이 얼만데) 그렇게 대충 일해도 되냐’, ‘이제 겨우 초등학생 저학년인 아이의 학원비가 왜 그렇게 비싸냐’, ‘남과 비교하며 사는 건 옳지 않다’ 등의 말을 은근하게 해댔던 거 같다. 대체로 과묵한 편인 나는 위로보다는 조언을 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요즘 말로 ‘T’스러운 인간형.
언젠가부터 MBTI가 유행을 하면서 나도 내 MBTI를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검사를 해보니 INTP와 INFP가 번갈아 나왔다. 대체로 수긍이 갔다. 생각해보면 내 안의 T형 자아와 F형 자아가 왔다갔다한다. 누군가는 내게 너는 무조건 F라고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내게 대문자 T의 인간이라고 했다. 어떤 점에서는 매우 T스러운 인간이지만 영화 등의 콘텐츠를 볼 때면 F형 자아가 불쑥 등장한다. 예상치도 못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 콸콸 쏟는 식이다.
‘로봇 드림’ 이라는 영화를 보다 뜻하지 않게 눈물바람을 했다. 이 영화를 재미없게 요약하자면 개와 로봇의 우정이자 관계 이야기고, 수식어를 좀 더 보태자면 일종의 개와 로봇 버전의 ‘라라랜드’이자 ‘패스트 라이브즈’ 같기도 하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도그(개의 이름이 도그)가 어느날 TV를 보다가 홀린듯 반려로봇을 주문한다. 어색함도 잠시, 둘은 함께 일상을 보내며 즐거운 나날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해변에 놀러갔다가 로봇이 고장이 나고 함께 돌아오기 힘든 나머지 둘은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한다. 도그는 로봇을 데리고 오기 위해 갖은 노력들을 하지만 그사이 해수욕장은 폐장하고, 로봇을 구하는 일은 해수욕장 개장 시점으로 미뤄 두게 된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로봇을 갖은 고초를 겪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는데…
영화를 보다 불현듯 누군가가 떠오를 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연인일 수도, 과거엔 친했지만 어느덧 멀어진 친구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려동물일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전부였던 그가 어느덧 과거가 되고, 또 다른 인연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한 때 내 일상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조각들. 무심결에 길다가 듣게 된 노래 한 곡 덕분에 과거의 한 장면이 불쑥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젠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었을 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 속절없는 이별 앞에서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느껴봤을 것이다. 인생에서 맞이하게 되는 다양한 이별을 겪으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또 살아나간다.
개와 로봇, 그까이꺼 뭐길래 싶은 얄팍한 마음으로 갔다가 나도 모르게 울고 나올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