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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양 Dec 17. 2020

전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대입을 앞둔 고3이 했던 일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정보보호 영재교육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격주 토요일마다 수업을 들었다. 1년 동안 고등 기초반 수업을 들었다. 다음 연도에는 면접을 보고 고등 전문반 수업을 들었다. 기초반 수업과 전문반 수업은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학생들이 수업에 임하는 자세도 다르더라. 각자 정보보안 분야 중에서도 특기나 흥미를 가진 분야가 있더라. 영재교육원에서는 1년에 한 번 프로젝트 발표를 한다. 그래서 수업 초반에 팀을 정해서 프로젝트를 구성하는데, 같은 내용을 검색해도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 대회도 한다. 우리 교육원에서도 하고 전국의 교육원이 모인 대회도 있다. 교수님들이 대하는 자세도 다르더라. 1등을 주로 하는 친구들 위주로 교수님의 관심이 이어진다. 순위권에도 없는 나는 질문을 하는 것이 민폐같이 느껴졌다. "나는 왜 수업을 듣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럴수록 수업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런가?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수업 참석까지 안 해버리면, 내가 쌓아온 것들이 무너질까 봐 출석만 하고 엎드려서 잤다. 이런 나를 보고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 자는 학생은, 수업에 흥미가 없는 거야. 

내가 흥미가 없다고? 나는 정보보안을 배우기 위해서 내 발로 찾아온 교육원인데 왜 흥미가 없어졌지? 그래서 생각을 거슬러 올라갔다. 


수업시간에 잠 -> 수업에 흥미가 없음 -> 왜? -> 수업이 이해가 안 됨 -> 왜?  

나는 당장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보다 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알고 싶어! 기계인 컴퓨터가 어떻게 저렇게 작동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교육원 수업을 들으러 가지 않는 날, 그 원리를 찾아 떠났다. 




검색을 하다가 성균관대학교 반도체 시스템공학과에서 전공체험을 진행한다는 내용을 보게 되었다. 전공체험을 하면서 회로이론이나 로봇 공학을 알려준다더라. 뭔가 회로이론을 배우면 그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수원으로 떠났다. 


처음으로 멀리 와본 것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신 탓도 있었지만, 나도 겁이 많은 편이라 무서웠다. 그런데 너무 재밌더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재밌었다. 아쉽게도 회로이론이 내가 찾던 것은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많은 것들을 찾아 나섰다. 우연히 3D 프린터를 설명하는 책을 읽고 관심이 생겼던 찰나에 SNS에서 전국 연합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읽고 연합원이 되었다. 또다시 다양한 사람들, 하지만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 속에서 어울렸다. 세미나도 참여하고 전국 동아리 전시회 행사에도 참여했다. 그들은 자신의 흥미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더라. 적극적으로 배우는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다. 



자신의 꿈을 향해가는 멋이 있는 사람들 속에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더라. 하지만 여전히 궁금했던 답은 찾지 못했다. 그렇게 영재교육원을 수료했다. 전문반이 마지막 과정이었고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다니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들은 수능에 치인다. 여러 부담감이 겹치는 시기였다. 3년 동안 준비한 것들을 모아 가공하고 입시를 치러야 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은 정보보안전문가이다. 모든 진로 발표도 이렇게 했고, 정보보안에 흥미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학교 생활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맞는 길인가 의심이 들더라. 


내가 궁금하던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대학교에 진학하면, 무언가 달라지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왜 지금까지 그 궁금증을 해결하려 노력한 이유도 말이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것에 빠져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학급 게시판에 슈퍼컴퓨팅 캠프에 대한 안내글이 붙어 있더라. 4박 5일 동안 UNIST에 가서 슈퍼컴퓨터에 관한 내용을 공부하는 캠프였다. 전국의 학생들이 모이는 장소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같은 학교에서 3명이 팀을 이뤄 지원하고 합격해야 했다. 당장 같은 학년 중에서 나와 흥미가 비슷하고 참여할 의지를 보이는 친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관심 있어할 것을 안 같은 반 친구가 내게 물어봐주었다. "지은아, 너 할 거지?" 자신도 하고 싶다고 뜻을 전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3명이 팀을 이뤄 지원했다. 


솔직히 나는 팀으로 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다. 좋은 결과를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전에 같이 팀을 이뤘던 친구들은 처음에는 열의가 있지만 뒤로 갈수록 미루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친구들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나의 고정관념이었다. 정말 열심히 지원서를 썼고, 선생님 허락까지 받았다. 선생님은 우리가 정말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 하셔서인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우리가 합격했다. 학교에 현장체험학습을 내고 캠프에 갔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이 학교 수업을 빼고 캠프에 참여하다니. 이건 이례적인 일이 분명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하더라도 고등학생은 공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어색했던 우리 3명은 캠프에서 약간의 다툼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멋진 팀이었다. 수상은 못했지만 나는 이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캠프를 마치고 다시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의 삶으로 돌아갔다. 수능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갔다. 지역 내에 있는 규모가 큰 도서관인데, 우연히 게시판을 보다가 책을 출판한 작가가 진행하는 우주와 관련된 강의가 있다더라. 우주? 기계 작동의 원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적어도 기계를 작동시키는 물리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 


3일? 4일 정도 수업을 들었다. 책을 출판하신 유명한 논픽션 작가님이 진행하셨다. 작가님은 고3인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수업을 듣는다고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나는 그냥 작가님 수업이 재밌었던 것뿐인데. 3일째 되는 날 연락이 왔다. 슈퍼컴퓨팅 캠프 때 서포트를 해주셨던 선생님이 대전에서 대회를 진행한다고, 놀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고, 작가님의 수업이 끝난 후 가려고 계획했다. 


문득, 무모해져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 혹시 끝나고 어디 가시나요? 

기세 좋게 작가님의 차를 타고 대회장으로 갔다. 그리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내가 현재 고민하는 진로 문제, 작가님의 생각들을 말이다. 그때 했던 질문이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이렇게 여쭤봤던 것 같다. 


나 : 하고 싶은 일은 있는데 그걸 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재미없어요. 작가님은 책을 쓰시는 과정이 재밌으신가요? 
작가님 : 책을 쓰는 과정은 너무 힘들지만, 출판했을 때 너무 기분이 좋아.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지금은 작가님의 말이 200%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때는 조금 헷갈렸다. 그렇게 대회장에 도착했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몇 달만에 봐도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때 모두들 즐거웠나 보다. 다시 만나도 이렇게 좋은 것을 보면. 만나서 요즘 뭐하는지 같은 근황들을 이야기하고 박사님들도 다시 만나 뵈었다. 친구들도 다 모여서 다 같이 계속 먹었다. 



이때 처음 먹어본 닭발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맛있었다. 나는 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대회 운영을 하시던 박사님이 혼자 계시길래. 


박사님은 어떻게 컴퓨터 분야에서 일하게 되셨어요?


"내 전공이 화학과였는데, 화학과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많이 써. 그 프로그램을 만지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이 대답은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나는 전공을 한 번 정하면 바꾸지 않고 3년을 안고 있다가 대학교에 입학하고 진학한 전공으로 또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각하게 골랐던 건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 전체적으로 엮으면서 생각하면서 시도하지 않고, 그 순간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엮어나가면 되는 거구나. 전공이 직업이 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더라. 


결과적으로, 나는 지원했던 모든 대학교에서 불합격 처리를 받았다. 면접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사이버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배울 수 있었다. 단점도 있었고, 그것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다. 이뤄낸 목표도 있고 이루지 못한 목표도 있다. 아직 남아있다. 한참 남아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헤맸고 지금 또 갈림길에 서있다. 


남들보다 뒤처진다는 것에 두려움도 있었고, 내가 너무 대책 없음에 당황도 했지만, 재밌었다. 내가 뭐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재밌게 살고 있을 것 같다. 아아. 안심이 된다. 



재밌게 놀아보자. 


뭐,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되죠. - 멜로가 체질 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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