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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Jan 27. 2024

약 먹는 물로만 하루 권장량

일주일이면 140알

난 어렸을 때부터 알약을 잘 못 삼켰다. 감기에 걸렸는데 가루약으로 지어달라고 말을 못 하는 바람에 알약을 한 시간 동안이나 머금고 있기도 했다. 그 이후로 우리 집에는 알약을 빻는 기구가 생겼다. 알약을 삼키려 하면 헛구역질은 기본에, 물을 1L는 마신 것 같다. 못 삼키겠는데 자꾸 그냥 꿀떡하고 삼키라니까 너무 서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랬던 내가 하루에 20알의 알약을 삼킨다. 살기 위해서.


오늘도 어김없이 정신과에 갔다. 다른 날과 똑같이 우울검사를 했는데 점수는 다른 날과 달랐다. 46점이 나왔다. (60점 만점, 보통 16~20점 이하면 건강한 상태라고 판단한다.) 나의 우울 그래프가 치솟았다. 이 정도 점수는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울이 나에게서 흘러갔다고 생각했는데, 잊을 때 되니까 또다시 찾아왔다. 우울이 다시 찾아오면 꽤나 절망적일 줄 알았는데, 그냥 아무 감정이 안 든다. 드는 감정이라곤 다시 오는 우울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기에 허탈한 감정과 무력감 정도? 무덤덤한 나와는 다르게 의사 선생님은 너무 놀라셨다. 난 우울이 날 덮칠 때 항상 이 정도 감정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봤을 땐 많이 심각했나 보다. 그리고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이번 진료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은 저의 첫 정신과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의사 선생님께 의지를 하고 마음을 여는 게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치료에 대해서 성공적인 기억이 많이 없는데 그렇다 보니까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사실 저번 진료 때 자해가 반복되면 엄마한테 말한다고 했을 때, 이 진료실에서 자살과 자해 관련 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앞으로 없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제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 제 자신도 너무 맘에 안 들어서요. 어쨌든 여긴 정신과 진료실이고 제일 솔직해져야 하는 공간인데 여기서조차 거짓말을 하게 되는 제가 너무 싫었어요."


이렇게 의사 선생님한테 솔직하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내가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을 땐 퇴원해야 하니까, 개방병동에 있을 땐 폐쇄병동으로 가기 싫으니까 솔직한 증상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근데 말하고 나니 속 시원하긴 했다. 사실 의사 선생님의 반응이 좀 걱정됐는데 생각보다 잘 넘어갔고, 그냥 평소처럼 진료를 잘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만족스러웠다. 내 증상에 맞게 약을 바꿀 수 있었고, 좀 더 의사 선생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의 반응과 내 약의 개수로. 확실히 우울이 심해지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도 판단을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의사 선생님은 여기서 우울이 더 심해지면 절대 안 된다며 기분이 들뜨는 약을 처방해 주셨다. 솔직히 우울한 기분을 없애준다고 했을 때 난 힘이 생겨서 자살시도를 하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이건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약보다는 기분에 관련된 약이어서 그냥 먹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약 6알, 저녁약 4알, 필요시 약 1알까지 정신과 약만 모두 11알이다. 거기에 지금 추가로 하루 3번 3알씩 먹고 있는 다른 약까지 하면 하루에 약을 6번, 총 20알을 먹는다. 근데 난 앞에서 말했듯이 알약을 잘 못 삼켜서 한 번 먹을 때 두 컵정도 마신다. 그럼 약 300ml, 300ml x 6 = 1800ml의 물을 마시는 셈이다. 하루 물 권장 섭취량이 1.5~2L니까 약만 잘 챙겨 먹어도 몸에 물이 부족할 일은 없겠다.


너무 잘 나아지고 있는 중이었어서 다시 상태가 이렇게 나빠질 줄 몰랐다. 약을 이렇게 많이 먹게 될지도 몰랐다. 순전히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약으로 내가 나아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약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굉장히 먹기 싫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 없이, 영양제 먹는다 생각하며 먹는다. 솔직히 일주일에 먹는 약 개수를 세어보고는 놀랐다. 내가 일주일에 먹는 약이 100알이 넘는다니. 나의 첫 약 과다복용 개수가 100알 조금 넘는데 그거보다 많이 먹는다. 죽기 위해 약을 먹었던 그때보다 약을 많이 먹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이제는 살기 위해 약을 먹는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살기 위해.


이 조그만 알약들이 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허탈하기도, 그러면서 동시에 이 지겨운 약 삼키기는 언제 그만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가끔은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 못하겠다. 지금까지 약 먹은 게 아까워서라도 꼭 나아질 거다.


오늘도 20알의 약을 삼키느라 수고했다, 나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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