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졸리 Jul 31. 2021

오늘도 언어치료실을 다녀왔다.

어릴 때 언어치료를 하지 그랬어요. 엄마는 왜 언어치료실로 안 보냈을까?

언어치료를 그만둔 지 5년 만에 높디높은 언어치료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언어치료실이 많았고, 동네 커뮤니티의 정보에 의하면 잘 가르친다는 언어치료실 4곳을 추려내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드렸다.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4곳 중 1곳만 성인 청각장애인에게 언어치료가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고, 나머지는 성인 청각장애인을 받아주기 어렵다는 거절의 답변이었다. 한 곳에서라도 가능한 게 참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가능하다는 'ㅈ'언어치료실 원장님과 긴장되는 상담을 마친 후, 언어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 언어치료받은 지 8번째로 되는 날이다. 언어치료를 받고 오는 날이면 목이 부어있고 침 삼키기가 어렵다. 물을 벌컥벌컥 마셔 발성연습으로 메마른 목을 적셔야 했다. 

 

 나를 가르치는 언어치료사 선생님('오 선생님'이라고 칭하겠다.)께서는 대부분의 청각장애인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맹관공명'이 나에게 많이 울린다고 하셨다. 오 선생님의 설명에 의하면 발성할 때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어야 하는데 입 안으로 맴도는 듯한 소리, 즉 소리를 내뱉는 것이 아니라 입 안으로 삼키는 느낌이라고 하셨다. 발음은 상대적으로 손 볼 곳이 별로 없으나 맹관공명, 과대비성 등의 발성 문제로 말 명료도가 낮아지고 청자가 듣기에 불편한 음성이라고 하셨다. 


 언어치료를 1회당 약 45~50분 정도 진행되고 대부분의 시간은 발성과 모음 교정으로 진행된다. 오늘은 '오', '이'를 배웠다.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청각적 피드백이 스스로 어려운 나는 성대 울림, 혀 위치, 희미하게 알듯 말듯한 청각적 변별 등을 기억하며 '오', '이'을 계속 연습했다. 



 무슨 연유로 언어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언어치료를 시작하게 된 사정은 길고 복잡하다. 그 얘기는 나중에 구구절절하게 풀고 싶다.(아무도 안 보겠지만..)

 아무튼, 사정을 축약해서 말하자면 청인으로 둘러싼 청인 중심 사회에 살아가고 녹아들기 위해 언어치료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녹아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틈에서 억지로라도 끼워 맞추고 싶었다.) 이때가 21세였다. 그래서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언어치료를 받아야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저는 지금 언어치료를 받고 있어요. 정말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어요. 입 속에서 하나의 소리를 내기 위해 복잡하고 바쁘게 움직일 줄 몰랐어요. 재미있어요."라고 공개적으로 드러내면 


 "어릴 때 받는 게 더 좋지 않았나요?"
 "어릴 때 하지 그랬어요. 왜 안 했어요? " 
 "언어치료는 어릴 때 받았어야죠!"
 "부모님께서 맞벌이하느라 바빴나봐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무례한 질문이라고 느껴본 적 없고 당연히 궁금해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수용했다. 하지만 그 질문들의 기저에 나의 부모님의 교육방식을 질책하는 듯한 느낌이 깔려 있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나조차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에 해답을 찾으려고 엄마께 여쭤봤다. 


 "엄마, 왜 나를 어릴 때 언어치료실로 안 보냈어?" 

 "지은아,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어. 지은이를 매일 언어치료실의 좁은 공간에서 훈련시키는 것보다 또래들과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기르고 많이 보고 즐겁게 살게 해주고 싶었어. 힘든 추억보다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었어. 언어치료실을 데리고 갔다면 친구들과 함께 놀 기회가 없고 힘들어했을 거야. 덕분에 지은이는 지금 밝은 것 같아. "

 "그렇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엄마 생각은 변함없어?"

 "응. 엄마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지은이가 너무 잘 커줘서 후회 없어."


 그렇다고 해서 청각장애 자녀를 언어치료실로 보내는 부모님의 선택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모두 각기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저마다 다른 교육철학이 존재하며, 교육방식도 저마다 다를 뿐, 결국 자녀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은 모두 똑같음을 잘 알아 이 세상 모든 부모님의 교육철학을 존중한다.


 나 또한 나의 부모님의 교육철학을 존중하고 닮으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언어치료를 받냐 라는 위와 같은 질문에 바로 대답할 수 있고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우리는 처음부터 어떤 일, 어떤 능력을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잘 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노력하고 반복하다 보면 축적되어서 점점 잘하게 되고 성취감과 자신감, 기쁨을 느낀다. 나의 언어치료 과정이 힘들고 고되지만 이 과정을 거듭할수록 차곡차곡 꾹 눌러쌓아, 내 삶을 더 풍요하게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언젠간 좋아질 것이다. 늘 그래 왔듯이. 



오늘도 언어치료실을 다녀왔다. 

작가의 이전글 사물화 된 관계에서 인격적 관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