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 사람 눈에 내가 철이 없어 보였는지
'부모님이 대학교 학비까지 다 내줬는데 이제 네가 효도 좀 해야지'라는 식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부모님이 대학교 학비를 다 내줬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경험을 단정 짓곤 하니까.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난 대학 학비의 대부분을 내가 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취업 후 내가 번 돈으로 다 상환을 했으니 결국 '내돈내공'이었던 것이다.
요즘 빚을 내서 투자하는 걸 '빚투'라고 하는데
어쩌면 스무 살부터 우린 이미 '빚투'를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돈이 있다면 무조건 자신에게 투자하는 게 부모의 마음일 텐데
부모님이 그런 형편이 안 된다면 우린 자기 자신에게 빚을 내서라도 투자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대학교 4년 내내 '영끌'을 했고 졸업하고 나니 많은 빚이 내게 쌓여있었다.
그때는 막막해 보였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학자금 대출의 빚은 다 갚았는데
아직도 갚지 못한 다른 빚이 내게 남아있다.
나름 갚는다고 하는데도 돌아보면 다시 원점으로 쌓여있는 마음의 빚.
서울에서 딱 한번 엄마와 단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처음 학자금 대출을 받으려면 은행에 가서 직접 신청을 해야 했고
나와 함께 은행에 가기 위해 엄마는 기차를 타고, 또 낯선 지하철을 타고 우리 학교 앞으로 찾아왔다.
지금에야 '부모님이 고등학교까지 키워줬으면 됐지 대학 학비까지 다 내줘야 되나',
'매 학기 몇 백만 원씩 다 내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나'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땐 내가 철이 없어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 게 창피했고,
이게 다 나중에 내가 갚아야 할 빚이 된다고 생각하니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 모난 마음 그대로 멀리서 온 엄마에게 내내 툴툴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날 엄마는 은행 업무를 보고, 근처에서 밥을 한 끼 먹은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잘 모르는 지하철을 타고, 청량리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요즘은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산책로에서 츄리링 차림으로 함께 운동을 하는 엄마와 딸을 볼 때마다 그들의 일상이 부럽다.
그러다 때론 나의 강력한 N력을 발휘해
'원래 집이 서울이라면 가족들이 흩어져 지낼 일도 없을 테니
나라도 서울에 뿌리를 박아 이 대물림을 끊어야겠다!'는 과격한(?) 다짐을 할 때도 있고,
때론 엄마가 홀로 날 찾아왔던 그날을 떠올리며 후회하곤 한다.
그날 엄마에게 우리 학교 곳곳을 소개해주고, 같이 사진도 찍고 학식도 먹고,
새로 사귄 대학교 친구들도 소개해줬다면 아주 근사한 둘만의 데이트가 됐을 텐데.
몇 천만 원의 학비를 자식을 위해 내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대신 대출받는 법을 알아보고, 잘 모르는 길을 찾아가고,
내내 얄밉게 투덜거려도 그 철없는 마음 모르는 척 받아주는 것도 큰 사랑이란 걸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안다.
그래서 그동안 엄마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보려 나름 애를 쓰지만
그 빚이 얼마나 깊고 많은지 가늠할 수 없어
이 빚을 깨끗이 정산하는 날은 좀처럼 올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