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그려내는 시간

by 지원


고요한 새벽 바다

발이 닿지 않는 바닥을 상상한다


바닥은 침묵 속에 있을 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붙들고 가는 건 물 위의 소란한 일상이다


자다가 깨면 소리 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마음을 가만히 들어준다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위로한다


홀로 그려내는 시간이 없다면

지난날의 마음을 힘겹게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차분해지는 밤이다


한 줄기 마음을 잡고 견디다 보면

또 다른 줄기가 피어난다


마치 내가 봄이 된 듯 피어나는 것 같다


피어나는 계절에 맞춰 자연스럽게 극복이 된다

또 한 번의 시간을 이겨낸 듯 엉켜 있던 마음이 풀어진다


햇살에 반짝이는 빛을 심고 물을 듬뿍 주는 날들

그런 봄을 다시 맞이한다






어젯밤, 아이의 잠을 체크하고 거실 창을 조금 열었다. 밤에 홀로 남겨진 듯 식탁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세상의 모든 형태들이 외로워지는 밤엔 눈치 보지 않을 자유가 주어진다. 그런 자유가 어둡고 컴컴한 외로움을 달래 준다. 마음에 가득했던 소리들도 편안하게 잠을 자는 시간.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쓰는 시간이 행복하다.


매일의 기분을 달래며 하루살이처럼 사는 것이 현실이라면, 글을 쓰는 나는 조금 더 그 삶에서 자유로워진다. 상처를 조각하고 전시하고 싶지는 않다. 기억을 재생하고 해체해서 들여다보기만 한다.


매일 반복하는 일로 조금씩 지칠 때마다 얕은 오르막을 오르거나 내리막을 내려가는 일처럼 글을 쓴다. 심심한 걸 적고 심심하게 생각한다. 심심한 것이 내겐 재미있는 것이다. 심각하게 쓸 필요도 없고 그저 쓰는 일에 감각을 둔다.


평지를 걸어가도 기분은 매일 다르기 때문에. 내가 감각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내가 충실히 반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분만이 필요하다.


문장을 나열하는 건 떠오르는 순서 대로고, 하고 싶은 말은 즉흥적으로 버무린다. 이름을 물어보면 나도 모른다. 이름 모를 무엇이 연결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문장의 연결에 기승전결을 두지 않고 그저 써보는 중이다. 조금씩 벗어난 초점도 내가 보는 시선일 뿐이다. 의미가 있을까를 떠올리다가도 그냥 쓰는 것에 마음을 섞는다.


극적인 요소가 없는 잔잔함을 사랑하는 편이다. 글을 쓰며 자연스럽게 나를 더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요즘은 매일의 나를 만나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다.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것만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매일을 지킬 수 있기도 하니까.

과거에는 타인을 관찰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열심히 하는 시간이 좋다. 내 안으로 들이고 내뱉는 순간들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조금 더 행복해졌다.


나를 지켜낸다는 건 엄마가 된 이후로 더욱 특별해졌다. 조금 더 걷고 조금 더 움직인다. 앉아있을 때도 계속 생각하고 계속 쓴다. 멍 때리는 시간을 줄이고 머리를 굴린다.


여백으로 비우는 시간을 두지만 여백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나와 약속한 시간을 지켜내기 위한 노력인 것 같다.


매일의 나를 쓰고 건져 올리는 일이 습관이 되면 불안에 지지 않을 힘도 생길 것이다. 지겨워도 반복하는 힘이 바탕이 되어야 더 사랑할 수 있다.


매일 되풀이되는 과정을 부드럽게 넘기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넉넉한 마음을 갖고자 일부러 다른 환경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가만히 그저 내어주는 건 없다. 노력해야 상황은 달라진다.


아주 작은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순간적으로 눈을 감게 된다. 티끌이 눈에 들어간 것은 인지해도 쉽게 빼내지 못할 때도 있다. 잘 보이지도 않는 것 하나가 몸에 박히면 걷기가 힘들어지기도 한다.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건 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사소한 것들과 다정하게 지내야 한다. 자연과 함께 흘려보내더라도 굿바이 인사는 건네야 한다.

마음은 반드시 몸을 쫓아올 테니까. 그래야 걷는 날들일 테니.






오랜만에 두모악에 가고 싶다.


오래전 5월, 버스에서 내려 뜨거운 햇살을 마주하며 갤러리까지 걸어갔던 날, 까만 돌담길과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나의 첫 제주, 가장 큰 감동이 있었던 곳은 김영갑 갤러리다. 폐교로 만든 갤러리에서 사진을 보고 무인카페에 앉아 창 밖을 보고 싶다.


그때의 그 나무들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훌쩍 커버린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네줄까.


마음에 무얼 심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던 시간들. 그런 시간을 떠올리면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별을 떠올리며 마음에 빛을 심는다. 언제든 스위치를 올리면 은은한 빛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불이 꺼진 방 안에 누워 별빛을 그려본다.



별을 가두지 않고 별을 본다

깊이 새겨진 별의 모양을 기억한다

별 하나의 빛을 사랑한다면

단 하나의 별이라도 내게 와서 반짝일 거야



모든 감정은 내 안에서 창조된다. 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내가 심지 않은 것은 없다. 미처 뽑지 못했던 잡초들이 자라나 숲을 이루기도 하는데, 잡초만 가득한 숲도 결국은 내가 만든 숲이다.

어떤 숲을 만들지는 내 마음에 달려있다.






입 안에 맴돌던 말이 입에서 익어간다.


앉은자리 어디서든 노래를 부르는 새들이 부럽다.

닿기만 해도 싱그러울 바람은 온통 녹색일 너를 그립게 한다.


계절을 건너뛰며

계절을 맞이한다.


나는 사랑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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