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by 강비

카톡이 조용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맘때쯤이면 온갖 잡담과 인사로 카톡방이 바글바글했는데, 이젠 짧은 인사만이 전부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십년지기 친구들 '개모임(오타 아님)' 채팅방의 한 문장. 취준 한다 고생하고 졸업 준비한다 고생하고 노동한다 고생했네. 우리 네 명의 2016년을 간단히 결산해버린 친구의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내년엔 다들 돈 많은 백수 되자-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세명의 친구들은 읽씹을 했다. 이래 봬도 중학교 때는 연말마다 각자에게 몇 줄의 인사와 몇 줄의 성의와 몇 줄의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문자 메시지로 보내던 사이다. 애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세월이 야속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야속하긴 야속하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라는 말을 80바이트로 가득 늘려 새해 문자를 주고받았던 우리는 'ㅇㅇ건물주 소취'를 주고받는 사이에까지 이르렀다.

고등학교 때 알게 되어 지금은 간호사가 된 친구 둘도, 세월이 야속하기는 매한가지다. 마찬가지로 80바이트 꽉 채워 새해 문자를 주고받았던 이 둘은 올해엔 연락도 뜸하다. 오늘도 일한다는 카톡이 오고나서부터 내 말풍선 앞에 달린 1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불쌍한 것들. 바쁜 너네들도 꼭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건물주가 되기를.


어쨌든 정말로, 세월이 야속하다는 거다. 가요대제전을 보면서 sms 문자로 전환되기 직전의, 텍스트 가득 채운 새해 인사를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보내던 나는 어느새 새해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나이 먹어감을 느끼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거창한 새해 목표도 세우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언제부턴가 12월의 마지막 날도 평소처럼 보내기 시작한 나는 오늘도 오늘을 12월 30일처럼 보낸다. 일어나서 밥 먹고, 영화 보고, 책 읽고. 인터넷 좀 하다가 잠들 것이다. 물론 해돋이도 보지 않는다. 매일 보는 게 해인데 뭐.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야 할 목표도 있을 리 없다. 나는 세운 목표를 향해 처절히 내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숱한 세월과 경험에서 우러난 교훈이라 해야 할지.


세월이 야속하다. 그래 봤자 고작 이십 대 중반인데. 어느 순간부터 새해는 그동안의 나의 모든 것을 리셋하고 리뉴얼할 기회가 아니라 그저 숫자에 머무르고 있다. 이번에는 2017 네 자리다. 굳이 따지자면 새해보다는 연말에 조금 더 의미를 두게 됐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 '1일부터 열심히 해야지!'라고 멋지게 다짐하기보다는 지난 1년을 머릿속으로 찬찬히 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고. 따위의 것들.

올 한 해 동안의 나는 노동을 했었고, 처음으로 건강보험이니 연말정산이니 하는 것들을 들으며 머리도 좀 아파봤고, 사회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고민도 했으며, 그 사이에 내가 좋아하는 원더걸스도 컴백을 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홀로 여행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기보단 울기를 많이 했던 한 해였다. 지난 열두 달을 돌이켜보며 잘한 것은 내년에 또 하고 잘못한 것은 반복하지 않기로, 세월의 풍파에 하도 부딪혀 무덤덤해진 내가 작게나마 목표를 세워본다. 그것 외에는 그저 29일처럼, 30일처럼 무탈하게 흘러가기를.

그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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