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이야기

by 강비


퇴사하기가 무섭게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넉 달 전 항공사 얼리버드 행사로 제법 싼 가격에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일본행 티켓은 2주간의 휴식을 보장해 주었다. 약 보름 동안이나 일탈을 누려야 할 만큼 훌륭한 회사를 다닌 것도 아니며, 대단한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퇴사한 것도 아니었지만(계약 만료에 의한 퇴사였다), 어쨌건 한 해 동안 빠듯하게 직장생활을 한 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어제'의 일상을 수백 번이나 보냈던 탓에 완전히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수없이 돌아가는 쳇바퀴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가족들의 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도쿄로 향했다. 나의 퇴사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듯이, 나의 여행에도 아주 대단한 이유나 이루지 않고서는 못 배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통해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목적의식과 삶에의 의지, 그리고 자아를 블라블라... 는 내 적성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조용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그간 미뤄뒀던 책이나 읽으며, 다른 나라에 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볼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 식으로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며 3박 4일 동안 도쿄에 머무르다, 나가노에서 유학 중인 M에게로 갔다. 그곳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흘러 보내다 한국행 비행기가 뜨기 전 날, 다시 도쿄에서 1박을 할 작정이었다.




"이왕 여행 간 건데 시간을 좀 더 알차게 쓰는 건 어때? 거기까지 갔는데 집에서 그냥 있기엔 너무 아깝잖아."


나의 이러한 행태를 알게 된 십년지기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의 안부 인사에 어떠한 필터링 없이 솔직하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M이 학교에 가고 나서야 느지막하게 일어나 대충 점심을 때우고, M이 돌아오면 같이 영화를 보거나 각자 할 일을 했고, 그러다 저녁이 오면 근처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형편이 안되면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그러한 매일매일이었다. 나의 일상들을 답례 인사차 고대로 전하자, 평소에는 먼저 톡을 보내도 곧잘 씹던 친구들에게선 보기 드문 반응들이 나타났다. 요는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그럼 거기서 뭐하는데?"

"그냥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시간들에 이보다 적합한 말이 어디 있을까.


"어디 구경도 안 하고 계속 집에만 있는 거야?"

"응."


단톡방이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곧이어 장문의 카톡들이 들이닥쳤다. 언제 또 그렇게 오랫동안 해외에 나갈지 모르는데 좀 바쁘게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M이랑 같이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겠지만, 집에만 있기엔 네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나라면 하루하루를 그렇게 안 보낼 것 같다... 등의 의견들이었다. 이것 또한 여행의 일부라 생각해 왔던 나로서는 다소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십년지기 친구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고, 학교에 간 M을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그 카톡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잊히지가 않았다.


내 의견을 완전히 관철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


홀로 남은 방에서, 지난 시간들을 곰곰이 되짚어보던 나는 M이 돌아오자마자 피곤에 전 그 애의 몸을 끌고 일단 현관문 밖으로 나갔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간에, 이제 와서 어딜 가냐는 M의 말에 별다른 행선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나는 전철로 30분, 내려서 20분은 걸어가야 하는 우에다 성이라도 봐야겠다며 박박 우겨댔다.




기어이 도착하고만 우에다 성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1월의 나가노현은 오후 4시만 되어도 해가 졌다. 흔한 가로등 하나 존재하지 않는 성의 내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무서울 정도였다. 박물관이나 전시회장도 일찍이 문을 닫은 탓에 그야말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다. 아니, 딱 두 개 봤다. 강아지와 산책 중인 행인 한 명과 포켓몬 GO를 하다 다치는 경우가 있으니 한눈팔지 말고 정신 차리라는 간판 하나. 주변을 둘러싼 어둠만큼이나 깊은 침묵 속을 거닐던 우리는 찾아오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성을 빠져나왔다. 마침 전부터 가고 싶었던 식당을 봐 뒀던 터라 나는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고, 성 안에 발을 들일 때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던 M의 마지못한 동의에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설상가상이었다.

처음 구글맵을 찍었을 땐 분명 걸어서 10분 거리랬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소요시간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핸드폰의 지도만 쳐다보면서 시키는 대로 10분을 걸어봤지만 당연히 식당은 나오지 않았고, 줄곧 굳은 표정이었던 M의 얼굴은 걸으면 걸을수록 험악해져 갔다.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M의 불편한 기색에 이 여정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억지임을 눈치챘지만 어째선지 멈출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때는 그랬다). 딱딱하게 굳은 우리 사이의 공기를 유지한 채 30분은 더 걷고 나서야 그토록 고대하던 식당을 볼 수 있었다.

식당은 가족 손님으로 가득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둘만이 세상과 동떨어진 듯했다. 비싼 코스 요리 사이에서 빛나는, 우리 둘의 탄탄멘 두 그릇이 더욱 괴리를 자아냈다.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남들보다 빠르게 탄탄멘을 '쑤셔 넣고는' 식당에서 모습을 감추다시피 했다. 값은 내가 치렀다. 당연히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11월의 나가노는 제법 춥기에, 돌아가는 길은 되도록 빠른 길로 가기로 했다.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구글맵이었지만 인적 드문 주택가를 걷는 우리에게 지푸라기라곤 그것뿐이었다. 어찌 됐든 배는 채운 탓에 잔뜩 날이 섰던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느슨해졌지만, M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내 사과를 기다리는 게 분명하리라. 언제 말을 꺼낼까, 눈치를 보며 한참을 걷던 내 입에서 돌연 튀어나온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야, 저거 봐!"


새까만 어둠이 즐비한 주택가 속에 단 한 군데, 빛나는 빛이 있었다. 작은 소음과 움직이는 인영도 함께였다. 워낙 빛이 드문 동네였기에 일순간 호기심이 돋은 우리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곳은 자그마한 동네 서점이었지만, 사람들은 노래를 하고 있었다.

대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기타와 우쿨렐레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있었다. 조명은 따듯했고, 그 빛은 행복의 기운이라도 되는 모양인지 모든 사람들이 불빛 속에서 신나게 움직였다. 한국인 두 명이 찬 바람을 맞아가며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기운은 우리에게까지 서서히 번졌고,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제야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늦은 사과였다.

그리고 나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어렵게 얻은 2주간의 기회를 헛되이 쓰지 말라는 얘길 들었고, 그 말도 맞는 말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조바심을 냈고, 그 결과 너를 불편하게 만들었음을. 내 구구절절한 설명을 듣더니 M은 허탈한 듯 웃고 말았다.


"네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건 네 맘이지."


그제야 알았다. 여행에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구워삶든,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더라도 그건 시간을 지니고 있는 주인의 마음이라고.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시간을 보내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며, 이것 또한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친구들이 빠듯한 일정으로 시간을 채우며 여행을 즐기듯, 가만히 앉아 시간을 쓰는 것 또한 일종의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우에다 시의 한 일대를 돌아다닌 그 날의 경험은 나에게 이런 것들을 알게 했다.


그 날로부터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인생의 수많은 일화 중 하나가 되어 간간히 떠오를 때마다 웃어넘기곤 한다. 그때 내가 나가지 않았다면 이름도 모르는 동네 책방에서 노래를 하는 보기 드문 광경은 못 봤을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날의 우스꽝스럽고도 한편으론 애잔한 경험은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앞으로의 내 여행의 토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건 본인의 자유라는 M의 말 또한. 앞으로 수 없이 찾아올 여행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M의 말을, 나의 토대를 되새길 참이다. 이 토대로 인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고.

이 글의 토대가 되어 준 M에게,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처음 하는 모든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