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없이 시댁에서 살기로 결심하다

모두가 의아해하던 자발적 시댁살이의 서막

by 감성있는 언니

아기를 데리고 무작정 시댁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남편 없이 아기와 나, 단 둘이.




2024년 6월,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남편의 박사 후 연구(흔히 '포닥'이라고 한다) 과정 때문에 미국(보스턴)에 동반 체류하는 중에 낳은 소중한 아기였다.


타지에서 엄청난 입덧과 향수병은 가끔씩 날 힘들게 만들었고, 초음파를 잘 봐주지 않는 미국 산부인과 문화로 내 초음파 앨범은 먼지만 자욱이 쌓여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한국과 다른 미국 출산 문화로 고생했던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열 달을 채운 후 36시간 유도분만 그리고 응급 제왕수술, 산후 조리원 없이 바로 이어지던 육아까지.


나는 너무 힘들었던 임신, 출산 기간을 거쳐 그보다 더 심한 산후우울증과 싸워야 했다.

타지에 와 고생해 주신 친정 엄마에게 죄송하지만, 나에겐 산후 몇 달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 엄마가 직접 미국으로 오셔서 물심양면 내 회복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당시 엄마의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았을뿐더러 건강까지 악화되셔서 내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심지어 남편에게 그 시기는 꽤 중요한 시기였고, 육아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기를 데리고 잠시 한국에 다녀오기로 했다.


친정에 있자니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 휴식이 필요해 보였고, 그렇다고 따로 방을 잡자니 소요되는 비용과 더불에 혼자 갓난아기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선택지는 딱 하나였다. 시댁행.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딱 하나라고 강요받는 것 같아 고통스러운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이런 것까지 포함되어야 하는 건가 싶고, 이러한 감정들이 뒤엉켜 산후우울증에 가미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내 첫 시댁살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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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 소개를 아주 간단히 하자면, 그들은 먼 시골에서 올라와 무일푼으로 서울에 정착하셨다. 막 상경한 사람들의 형편이 그렇듯, 가난한 시절을 버티며 서울 살이에 적응하셨고, 성실히 모아 지금은 재건축을 목전에 둔 서울 자가에 살고 계신다.


아들 둘을 낳았고, 그들은 매우 건강하고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다. 둘 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왔고, 첫째 아들은 번듯한 대학 교수로 얼마 전 정년을 보장받았다.


내 남편이기도 한, 둘째 아들은 박사과정을 거쳐 하버드에 포닥으로 나가 일하고 있는 중이다. 두 아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고, 만나보면 본받아야 할 점이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만약 내가 키운 아들들이 저렇게 잘났다면 목에 힘주고 으스댈 만도 한데, 시부모님은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며 조용히 웃으신다. 결코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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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나갔기 때문에 시부모님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위에 적은 내용이 전부다.






2024년 10월, 시댁에서의 두 달 살이가 끝났고 미국에서 온 남편과 함께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두 달 가까이 지내며 몸도 마음도 회복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하루 종일 육아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런저런 소식들로 머리 아플 일도 없을뿐더러, 도움받을 곳 없이 하루 종일 가정보육을 하다 보니 가만히 육아를 하며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퍼즐 파편처럼 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시댁에서의 생활들이 떠오르며 어떤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아, 이 집에서는 어떤 아이가 태어났어도 잘 될 수밖에 없었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 년 반이 흐른 지금, 남편은 인생을 걸고 성과를 내야 하는 중요한 길목에 다시 서있게 되었다. 그런 남편을 위해 나는 아기를 데리고 잠시 자리를 비워줘야 했고,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이번엔 친정으로 갈 수도, 시댁으로 갈 수도 있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친정에 머무르며 편한 한국 생활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기꺼이 아기를 데리고 남편 없이 시댁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여보, 나 시댁에 들어가서 몇 달간 한 번 지내볼게. 그곳에서 지내며 잘 관찰해 보고 많은 질문을 던져볼 거야. 앞으로 우리 육아에 대한 여러 가지 가치관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세워보고 싶어. 이왕 가는 거 나도 의미 있게 지내다 올게."


어떤 아이가 태어났어도 무조건 잘 자랄 수밖에 없었겠다고 느낀 이유, 그게 궁금했다.


친정 식구들은 주말에만 왔다가는 나에게 왜 이렇게 짧게 있냐며 살짝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하지만 친정에서는 이미 몇 십 년을 넘게 살며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나에겐 그것 외에 새로운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평생 간직 할 그 무언가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살짝 겁도 난다.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감정이 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괜한 것에 서운하고, 눈치 볼 수도 있을 것이며, 포기해 버리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가,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건데, 해보려고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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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ImageV3KeVO.heic 시댁으로 들어가는 길에 한 컷, 나는 과연 이 곳을 몇 번이나 지나게 될까?

남편이 오라고 하면 언제든 보스턴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시댁에 머무르며 잘 관찰하고, 답을 구해보도록 해야겠다. 부디 목표했던 두 돌까지 무탈하게 잘 지내고, 무언가를 갖고 웃으며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내가 배운 것들과 느낀 것들을 이곳에 엮어 나가고자 한다.

과연 나에게 2026년 상반기는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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