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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 모두의 언니 Jul 22. 2023

아니, 또 임신이래?

동생에게 보내는 열아홉 번째 편지


무지 흰 티를 걸어 놓은 현대 미술의 세계는 너무 심오하다. 반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주지만 막상 정해진 답은 없다는 점에서 예술의 진짜 본질은 무엇일까 생각해. 내가 무심코 지나치는 수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열어두고 살아야겠단 다짐도 해봐.




엊그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꽤나 심란한 시간들을 보냈어. 그동안 해왔던 루틴들은 뒤로 한 채 카오스 속에서 헤엄치며 열심히 길을 찾던 시간들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제 조금 진정도 되고 혼돈의 우주를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보이는 것 같아. 글을 찬찬히 써 내려가 볼게.


  보스턴에 온 지 일 년 가까이 되어가면서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과 말, "또 임신이래?". 한국에서는 주변에 미혼인 친구들도 많고, 아이를 가진 친구들도 많이 없었어. 나도 남편과 함께 취미 생활을 하며, 술 마시고 여행도 다니며 꽤나 즐겼다고 생각해. 물론 미국에 와서도 운동하고, 여행하며 열심히 신혼 생활을 즐겼지. 때론 한국보다 저렴한 위스키를 즐겼어.


 그런데 최근 들어 자꾸 "임신"이라는 것이 내 목을 조여와. 너무 숨 막히고 힘들 때가 있어.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갔던 도서관 영어 수업에서 만났던 한국인들. 모두 남편 따라 미국에 온 와이프들이었어. 그 5명 중에 3명이 임신을 했더라고.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한 명은 나이도 어리고 대학원 진학 예정이라 아직 임신을 서두르진 않는 것 같아. 분명히 모임에서 다들 그랬거든. 임신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지금은 임신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한동안 조용하다 오랜만에 만나면 하나같이 한다는 이야기가 "저 임신했어요"였어. 물론 너무나 축하할 일이지만, 나보다 나이 어린 동생들의 임밍아웃을 접할 때면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들어.


 얼마 전, 남편이 박사 과정에 있을 때 같은 연구실 소속이었던 선배도 임밍아웃을 했어. 미국에서 포닥과정에 있는 남편 바로 옆 건물에서 그 선배와 우연히 마주쳤고, 그 이후 우리는 몇 번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거든. 포닥 부부인데, 그 선배는 미국에서 일을 구하려고 하는 걸로 알고 있어서 당연히 임신 생각은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최근 남편을 통해 우연히 들은 임신 소식에 나는 또 은근한 압박감에 고개를 숙였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하버드나 MIT 배우자 모임에 나가면 무조건 2명 이상은 임산부들이 있었고, 그 모임에서 조금 친해지려고 하면 어김없이 임밍아웃을 하더라고. 


 아니, 이곳은 무슨, 임신의 도시야?


 




 물론 우리 부부도 애기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슬슬 아기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있어. 하지만 아직은 둘이 너무 즐겁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두렵기도 해. 게다가 만약 적극적으로 임신 준비를 시작했는데 잘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아이를 못 가지는 게 아니라 안 가지는 거라고 정신 승리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아. 


 솔직히 우리는 지금까지 두, 세 번 자연 임신 시도를 하다가 지금은 아예 시도를 안 하고 있거든. 최근 들어 남편이 자꾸 아이 얘기를 많이 하면서, 미국에 있을 때 최소한 두 명 이상은 낳고 싶다고 하더라. 남편 논문 유효기간을 따지만 이제 정말 미룰 수 없을 것 같아. 이제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챙겨보려고 영양제를 듬뿍 사 왔어. 


 그런데 왜 나는 임신을 하기가 두렵고 싫은지 모르겠어. 영양제를 한가득 사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답답한 마음으로 술가게에 들러 와인과 맥주를 사 왔어.


 정말 마지막 술이다-라는 생각으로 샀는데, 식탁 위에 놓인 영양제와 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역설적인 상황에 웃음이 나왔어. 뭐랄까, 내 마음속에서 이성과 감성이 엄청나게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영양제 가득, 술 가득. 내 마음속에는 이성과 감성이 싸우고 있어.




 오늘은 날씨가 좋아 찰스강 주변을 꽤 오랜 시간 걸으며 생각하고 또 했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과적으론 이제 한 번 마음잡고 임신을 제대로 준비해 볼까 해. 물론 준비하는 장면들 사이사이, 열심히 내 인생을 즐길 것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사랑하는 남편과 나를 꼭 빼닮은 아이를 낳아서 잘 키워보려고! 할 수 있겠지?


  집으로 오는 길에 우연히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를 봤어. 옛날에 많이 놀았던 정글짐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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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짐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아주 다양해. 끝까지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언젠가는 정상에 오를 수 있어. 건너편에 있는 친구가 더 빠른 길로 정상에 올랐다고 한들, 내가 있는 위치에서는 지름길이 아닐 것이며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속도와 힘으로 꾸준히 가면 돼. 너무 위만 보며 절망하지 말고, 가끔 옆에서 함께 올라가는 사람들과 아래에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도 보며 무너지지 않기를. 


 정상에 오르고 내려오는 길도 다양한 방법이 있어. 올라간 그대로 내려오는 사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 암벽 등반 코스로 내려오는 사람. 올라간 그대로 내려오면 안전하겠지만 지루하겠지. 미끄럼틀을 타면 스릴이 있고, 빨리 내려올 수 있겠지만 그 속도에 주변 풍경을 많이 놓칠 거야. 암벽 등반 코스로 내려오면 천천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위험할 수도 있고 힘들 거야. 


  나아는 어떻게 내려오고 싶어? 나는 암벽 등반 코스로 내려오고 싶어. 고개를 들며 때로 주변 풍경도 즐기고, 올라갈 때와는 색다른 즐거움으로 천천히 내려오고 싶거든. 





 내가 있는 위치에서 천천히, 멈추지 않고 끝까지 올라가 보도록 할게. 임신 이후에도 견줄 수 없이 더 어려운 날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내가 밟고 있는 이 위치에서 한 걸음씩. 시작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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