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대 그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닌 시절에는 한 교실에 70명이 넘는 학생들에, 한 학년이 12반이나 되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그중에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고아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 정도로 국민들의 삶이 아직 많이 열악했던 우리나라의 실정이었을 시절에.
내 엄마는 외출이 잦으셨다. 나가실 때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우찌 마끼(머리카락의 끝을 안으로 말음) 또는 소도 마키(바깥으로 말음)를 하고, 어느 날은 시아게(우찌 마끼나 소도 마끼를 한 다음 날에 정리만 하는 것)만 하시고 양장점에서 맞춘 멋진 원피스를 입고 나갔다 오시곤 했다. 그 시절에 옷을 맞춰 입고 다닌 사람은 흔치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우아한 엄마의 모습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다른 친구들의 엄마가 부러웠었다.
학교가 끝나고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 가 보면몸뻬 바지에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촌스러운 친구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배고프지?" 하며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뚝딱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와서는 나한테도, 친구한테도 궁둥이를 토닥거려주시며 어서 먹으라고 한 친구의 엄마가 참 좋았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친구가 부러웠던 나는 나중에 엄마가 되면 꼭 이런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된장찌개는 물론 매일 생선이며 나물이며 내 몸 힘들 때도 꾹 참고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에게 먹였다. 그리고 가끔 만나자며 전화해오는 친구들의 연락을 다 끊어 버렸다. 그 시절 신입사원이었던 남편 월급으로 한 달 생활을 해야 했는데 친구를 한번 만나고 오면 우리의 일주일 반찬값이 훅 날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옆집에 사는 같은 또래의 새댁들이 커피 마시자고 초인종을 눌려댔으나 내 생활에 방해가 된다며 현관문을 굳게 닫았다. 오로지 내 아기와 내 가정만을 위해 살았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내가 없는 내 인생을 살고 나서 생각해 봤다.
내가 왜 이래야만 했을까? 혹시, 우아한 엄마가 너무 무섭기만 했던 나는 무의식 중에 엄마와 반대로 살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이런 멋쟁이 엄마에게서 키워진 덕분에 엄마의 딸인 나도, 특히 나보다는 외할머니 DNA를 더 많이 물려받은 내 딸은 머리도 잘 만지고 옷도 멋지게 잘 입고 다닌다.
갑자기 궁금해져, 지금은 90을 바라보고 계신 엄마께 물었다.
"엄마! 그때 그렇게 예쁘게 머리하고 멋있는 옷 입고 어디를 다닌 거야?"
"그때? 친구네 집에 가서 걔네들 화투 치는데 뒤에서 구경했었지 뭐! " 겸연쩍게 웃으신다.
"뭐라고?"
어이가 없다.
화투를 친 것도 아니고! 구경이라니!
내 엄마가 그렇게나 멋지니까당연히 큰일을 하고 다니시는 줄 알았던 우리 형제들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