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트면 정신대에 갈 뻔했던 엄마.

by 이연

1929년에 태어난 내 엄마는 우리나라 가 겪었던 격변기를 함께 한 산 증인이다.

1910년 한일합병 조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 당하고 일본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된 식민지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해방이 되었던 1945년 까지 35년 동안이나 우리민족은 아픔의 긴 세월을 견뎌내고 해방을 맞았다.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터진 6.25의 비극을 온 몸으로 맞딱뜨린 세대가 현재 100세, 90세대 80세대 를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분들이신것 같다.

내엄마도 나라의 비극에 여지없이 피해를 보셨으니 그 일생이 한로 얼룩져 있으시다.

TV에서 종종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나오시면 눈물을 흘리며 분노에 찬 목멘 음성을 듣게 되는데,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아무일 없이 잘 살고 있는 우리가족에게 감사? 아니 내게 주어진 이 번 생을 더 잘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다.

왜냐하면, 하마트면 내 엄마가 정신대<엄마는 일본말을 하며 학교를 다녀서 정신대라 하지 않고 테이신타이 라고 하셨다> 로 끌려 갈 뻔 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나도, 내 형제들도 이 세상에 없었을거니까.

내 엄마는 우리나라에서도 저기 맨 끝에 지리한 곳.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다. 목포에서도 통통배를 타고 20분이나 더 들어가야 했던곳, 작은 섬 오지마을이어서 세상물정에 어두웠을 텐데도 엄마의 할아버지<나에게는 증조 할아버지>께서는 엄마가 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보냈다. 80년 전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깨우친 분이셨을 알게 한다.

그래서 어린엄마는 새벽밥을 먹고 통통배를 타고 목포 선창에 내리면 또 한시간을 뛰다가 걷다가 하면서 힘들게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사람은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광주로 데려가 중학교 시험을 치게 했는데 2군데서나 떨어진 손녀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순천까지 데리고 가서 시험을 치게 했다고 한다.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그 오지마을 시골에서 그것도 딸을 여기저기 시험을 보게 했던 우리 조상님들의 교육열정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그 때 광주에는 "야마떼" 고등과 라 하여 일본사람들만 갈 수 있는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감히 얼씬도 못하는 학교였지만 부모가 돈이 아주 많거나 공부가 특출한 학생만은 뽑았다고 한다. 엄마와는 상관 없는 얘기지만 엄마세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냥 묻혀져 버릴것 같아 사소한거라 할 수 있지만 써 본다.

대도시로의 진학이 안된 엄마는 다시 목포로 와 졸업했던 국민학교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중학교에 입학 했다고 한다.

그 때 담임선생님 이름이 "우루마" 선생님이었다고 기억 하셨다.

어느날, 우루마 선생님 께서 강당으로 다 모이라고 해서 강당으로 갔더니 큰 영상을<엄마는 영화를 보여 줬다고 하셨다>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 영화 속에서는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이 예쁜 머리수건을 쓰고 비행기 공장이나, 군사물자 만드는 깨끗하고 시설 좋아 보이는 공장에서 가지런히 앉아 일 하는 모습, 점심시간에는 줄 서서 식판에 밥을 타는 모습,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갈 때 하는 환송식, 일본에 도착하면 환영식을 주는데 기가 막히게, 환장할 정도로 잘해 주는걸 보고 엄마도 꼭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 마음을 홀려놓은 다음 우루마 담임 선생님께서는 반에서 두 명을 뽑아 일본으로 가는 초대장을 주셨는데 그 두 명이 내 엄마와, 엄마와 같은 동네에 살아 같이 통학 했던 "고니" 라는 친구였다고 한다.

그 초대장을 받은 엄마는 자기가 뽑혔다고 너무 좋아서 초대장이 구겨질까봐 접지도 않은채로 들고 집까지 뛰어가서 의기양양 소리쳤답니다. "내가 뽑혔다고"

마침 저녁식사를 하고 계셨던 할아버지께서 들창문을 열고 "뭣이냐?" 하시며 그 초대장을 보시더니.

"이제 큰 일 났구나! 이것이 가시나그 공출이다!" 하시며 굳은얼굴이 되시더니 "내일 부터 당장 학교에 가면 안된다!" 고 책가방을 벽장안에 넣고 문을 단단히 잠그셨다고 한다.

그것으로 엄마의 학교생활은 끝이 나고 엄마의 최종 학벌은 중학교 중퇴가 되고 말았다.

엄마가 세월이 지나고 드는 생각이 , 선생님이 목포에 사는 똑똑한 애들이 많은데 왜 시골 애들 두명만 뽑았을까? 시골에 사니까 부모님들이 무지해서 쉽게 허락해 줄 것 같아서 그랬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진짜로 일본에 가서 공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궁금해져 물었다. 그럼 정신대에 끌려간 친구는 없었느냐고.

설사 끌려간 친구가 있었더라도 못 돌아왔을 수도 있고, 또 돌아 왔더라도 말을 하지 못 했을거니까 그런 친구소식은 못들었다고 하셨다. 그랬을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맨 끝자락 오지마을에 까지도 끔찍한 손길이 뻗친걸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 말 못하는 희생자들이 더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몰랐던 순박한 어린 소녀들이, 생각만 해도 끔직하고 아찔한 그 잔인한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지,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내 엄마는 깨이신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정신대에는 안가서 천만 다행이었지만 곧 만난 6.25사변 때문에, 돌도 안지난 아들을 남겨둔 채 엄마 눈 앞에서 총살 맞고 죽어간 남편, 피난 중에 듣게 된 친정엄마의 죽음, 전쟁 끝나고 돌아와 보니 많던 재산 다 없어져 버리고 집에는 숟가락 하나 안남아 있어 망연자실 했던 기억이 떠오르면 몸이 떨린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에,

아직도 가슴을 쓸어 내리는 많은사람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가 진짜 해야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