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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May 16. 2019

눈이 부시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는 젊음은, 어릴적 꿈꿔온 것과 전혀 다른 젊은 날을 끊임없이 마주하는 나날들이다.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그려왔던 모습들과 매우 거리가 먼 내 모습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내 모습에, 그런 주변 모습에 익숙해져 더는 찬란한 내 모습을 상상하지 않게 되는 것이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럼에도 젊음을 추종하는 것은 그들에겐 ‘막연한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혹은 ‘어쩌면’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다소 허황되고 현실성 없는 미래를 품어볼 수 있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짧은 나이가 선사하는 선물이었다. (물론 평균 수명을 산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리고 막연한 미래보다 빛바랜 과거가 더 길어지는 순간 우리는 노인이 된다.

     

과거는 항상 미래를 앞서지만, 시간이 흐르는 방향으로 보면 과거는 항상 미래의 뒤에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는 언제나 미래보다 뒤처져있는 것 같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잘못된 행위이거나. 빨리 벗어나야 할 행위처럼 느껴진다.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올바르고, 과거보단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미래보다 과거가 긴 노인들은 과거보다 미래가 긴 젊은이들의 뒤에 서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게 노인들은 언제든 양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시대를 그리고 시간을.

     

재난영화에서 노인이 혹은 노부부가 젊은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죽음을 맞는 장면을 싫어했다. 아름답게 포장해봤자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닌 강요된 선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더 긴 세월을 살아온 노인이라는 점이, 그런 선택을 하도록 등 떠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살아왔으면 초연해지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게 늙음의 미덕일까. 오히려 그만큼 살아왔기에 더 삶을 갈구하게 되지는 않을까. 젊은 날엔 막연한 미래라고 미뤄두었던 죽음이 하루하루 선명해지고 가까워지는 나이엔 삶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어느 날은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닥친 것 같은 두려움에 가쁜 숨을 내쉬게 되진 않을까.

     

늙는 것이 두려웠다. 막연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나이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한참 뒤라고 미뤄두었던 죽음이 점점 선명해지는 나이가 두려웠다. 자꾸 과거를 흘낏거리고 앞으로가 전혀 기대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혜자가 25살로 돌아올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영영 돌아오게 될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끝없는 나락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혜자는 25살로 돌아온 적 없었다. 틈틈이 행복했고 슬픔과 그리움 사이에 웃음이 넘치는 삶을 살아왔지만,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곳을 향해 혜자는 시간을 거슬렀다. 알츠하이머라는 단어가 그런 혜자의 이상한 타임워프를 단번에 이해하게 했지만, 그래서 서글펐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아니더라도, 뻔히 예상되는 미래와 점점 흐릿해져 가는 과거 사이를 살아가는 삶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짐이자 굴레 같았다.

     

하지만 혜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시 쏟아져 내린 그리움에 과거를 돌아보긴 했어도, 그렇게 찬찬히 돌아본 내 삶은 꽤 행복했고, 그런 삶을 가진 현재의 나도 행복하고, 그런 나의 미래도 여전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때론 고달프고 슬플지라도 그것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의 인생을 통해 말했다.

     

막연한 미래 중 가장 막연하지 않은 것은 나 역시 점점 나이가 들 것이며, 노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혜자의 마지막 미소처럼 눈부신 미소를 갖고 싶다. 그러려면 눈부신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불안과 막연함이 안정감과 지루함으로 바뀌는, 결코 모든 것이 한 번에 주어지지 않는 이 삶을 살아내는 것 자체만으로 경이롭다. 그래서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삶이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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