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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Mar 26. 2019

책을 선택하는 기준

 내 삶을 선택하는 기준



어린 시절 책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두께'였다. 주변에 도서관이 없는 탓에 책장에 꽂힌 전래동화집을 제외하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갈 때만 책을 만날 수 있었다. 얇은 책은 단숨에 읽어버려서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작은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벅찬 두꺼운 책을 골라 엄마에게 내밀었다. 언젠가 내가 3권의 책을 골랐을 때 엄마가 잠시 고민하며 '지금 3권이 모두 필요할까'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책들을 사주었지만, 그 다음부턴 딱 한 권만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그 당시 난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살았는데, 길고양이들도 문 앞 창고에서 같이 살았다. 엄마는 고양이들을 보며 쥐 걱정은 없겠다고 말했지만, 종종 집안에서 쥐가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햇살보다 더 따스한 사랑으로 보듬어준 부모님이 있었기에 나는 한 번도 가정형편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어렵기는 커녕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이나, 작지만 따뜻한 이 공간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중학교 때는 서울살이를 접고 평택으로 내려왔다. 중학교 안에는 작지만 번듯한 도서관도 있었다. 덕분에 3권 그 이상의 책들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지만, 두꺼운 책을 고르는 습관은 여전했다.


내가 그곳에서 처음 만난 책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였다. 그 책을 읽어내는데 평소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책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비통하고 비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은 책을 도저히 볼 수 없어서 책을 덮었다가, 다시 볼 용기가 안나 한참을 펼치지 못했다. 마지막장을 겨우 읽어내고 연체료와 함께 책을 반납했지만, 그 책에서 묘사된 내용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 손을 떠난지 한참이지만 그 책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렀다.


내가 사는 세상이 처음으로 내게 안겨준 엄청난 충격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처럼 난 그 책을 통해 내 세상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던 벽이 사실은 부서지기 쉬운 계란 껍질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진 틈으로 보이는 바깥 세상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깨트리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불의, 전쟁, 고난, 고통 등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이 그에 해당했다. 그래서 현실에선 책 속에 묘사된 내용을 찾을 수 없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때론 영화나 책보다 더 끔찍했다. 아니, 책과 영화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이 도처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를 하게 되길 바랐다. 책을 읽는 것 이상으로, 이왕이면 필사적으로, 발버둥을치듯 무언가를 하게 되길 바랐다.



두터운 책들이 나에게 남긴건
그것보다 훨씬 묵직한 세상에 대한 책임감,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져야하는
의무 등이었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다. 바쁘다는 말이 핑계인 줄 알면서도 다른 핑계를 찾기도 귀찮았기에, 바쁘다며 책을 멀리했다. 이제는 책을 마음껏 살 수 있음에도, 신중에 신중을 가하며 책을 골랐다. 예산보다 빠듯한 마음의 크기 때문이었다. 겨우 단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한 의미나 지식을 얻겠다는 욕심 탓이었다. 이미 읽어본 사람들이 많을수록 안심이 되는 듯했다. 내 느낌보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에 귀 기울였다. 그래서 오랜시간에 걸쳐 검증된 고전을 선호하기도 했다. 시간도 돈도 이해력도 더 풍족해진 나는 오히려 더 적은 책들을, 더 협소한 범위에서 읽었다.

 

책을 고르는 내 기준이 이렇게 변화하는 동안 나도 변해갔다. 어쩌면 내가 먼저 변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고, 세계, 평화, 희망이니 같은 이야기는 순진하게 느껴졌다. 현실적이라는 말로, 어른이라는 말로, 지금의 내 자신에만 열중했다. 필사적으로 내 앞에 놓인 삶만 보았고, 아꼈고, 안쓰러워했다. 책이 나에게 무엇을 줄지만 고려했다. 내가 그 책을 통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두꺼운 책들을 기피하는 것처럼, 크고 무거운 의미가 담긴 단어들을 생각하는 것도, 입에 올리는 것도 줄여나갔다.


내 삶이라는 책은 어쩐지 시간이 지날수록 얇아지는 것 같았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너무도 작고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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