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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연 Oct 18. 2016

인터스텔라

별 사이 혹은 내 사이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ocn 에서 인터스텔라가 방영 된다는 소식에

급하게 거실로 내려와 티비를 틀었다.


그 내용, 그 상상력, 그 표현,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영화를 처음 보던 날이 떠올랐다.





세시간이 안되는 시간동안 어두운 극장에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그 주인공과 함께 머나먼 우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같이 머물다 온 느낌이였다.


누군가의 상상력에 이렇게 감탄, 아니 경외라는

단어를 쓰게 되는 것도 나에겐 첫 경험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주 기초적인 물리적

지식도 부족 했기에,

그런 상상력이 가능하다는 것 조차 생소 했다.

그래서 내가 영화를 보고 한 일은

영화에 나온 물리과학적 지식을

급하게 나마 이해할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곳의 원리 조차 몰랐던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누군가는 그 지식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발전시켜나갈 동안,

난 어쩌면 평생동안 궁금해 하지조차

않았을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지식들을 이해하고 탐구하고

발견해 나갈 사람들에게

생소한 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터스텔라는 어쩌면 그냥 상상력에

그치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가치관과 생각은

그 날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나의 가치는 우주만큼이라니,

적어도 나라는 우주에 변화를 준 것은 분명하다.





처음 본 그때의 생각과 느낌들이 다시 보게 되었을때의 생각과 느낌들로 대체 되는 것이 아까울 만큼의 전율을 느꼈었다.




슬펐다 상상했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상상하던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완벽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던 그 영화,
아니, 더 은밀히,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사물들/조르주 페렉




그래서, 다시 보기 두려웠던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쯤 이라면,

다시 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그때와 비교해 보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땐, 우주라는 또 다른 곳

혹은 차원 이라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면

지금은 어쨌든 살아가고 살아갈 우리,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해답을 찾고 찾으며 살아갈,

우주의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 한들

또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한들

살아갈 우리들이라는 존재가 말이다.






공상과학 영화에,

사랑을 믿는다는 말이 주는

울림은 묵직했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지구말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곳의 존재를 믿고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그만큼 이상적일 수 있을까.

인류의 미래라지만

내 아이들의 미래라는 말이 더 와닿았기에,

아이들의 인생을 위해

훌쩍 떠나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머피가 그 시계를 되찾지 않았더라면,

그 초침의 흔적을 발견해 못했더라면,

역시 지구만큼 살만한 곳은 없었더라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단지 인류가 사라지게 됨을

뜻 한다.


인류가 있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실패도 성공도 희생도 분노도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는 살아가는 동안을 살아간다,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인류는 살수 있는 만큼 살아간다.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그 말만큼 현실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이왕이면 인류의 미래를 손에 쥔 자가

감정적인 편이 낫다.

그리워하는 감정을 알고

사무치는 감정을 이해하고

억울한 감정에 북받치고

자신의 선택을 두려워할줄도 알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이,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그러고 보니 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도

당장 멸망을 눈앞에 둔 지구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너무도 소소한것들 마저 쉽게 순응하고 받아들였다.

분노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어둠에 목놓아

분노하는 노인보다 난 더 무기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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